절절한 그리움 때문인 것을.
마음이 아팠다.
너덜너덜해진 내 몸과 마음을 추스를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브런치를 만났다.
그것이 주는 위로와 공감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내 상처를 보듬으며 나는 그렇게 버터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순백에 가까울 정도의 운동치다.
중학교 때까지 무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외 모든 운동을 죄다, 철저히 못한다.
학창 시절, 제일 괴로웠던 게 바로 체육 시간일 정도였다.
체육 시간이 있는 날은 하루 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내게 운동이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내가 무슨 마음으로 골프를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지금도 갸우뚱하다.
게다가 배운 지 두서너 달만에 갈비뼈에 금도 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을 뒤척일 수도 없을 만큼의 통증이 나를 괴롭혔다.
병원에서는 당장 골프를 그만두라고, 혹여나 갈비뼈가 부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정말 큰일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래서 병원을 그만 다녔다!
그리고 2~3주 정도 쉰 이후로 나는 또 골프채를 잡았고, 그 이후 거의 매일 골프 연습이나 스크린 골프 게임을 한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나는 막냇동생과 남자친구(현 남편), 이렇게 셋이서 일을 마친 후 스크린 골프를 즐겼다.
그날은 어쩐지 유난히도 즐거웠다.
어떤 날은 골프가 너무 안 돼서 짜증도 나고 하는데,
그날은 유독 우리 셋이서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골프를 쳤다.
특히 막내가 그렇게 신나 할 수가 없었다.
완전 골린이인 나에게 막내는 스윙 방법도 가르쳐 주고, 잘할 거라 용기도 듬뿍 실어주었다.
"누나, 낼모레면 이제 코로나 방역 조치도 해제되니까 그날은 우리 셋이서 스크린 골프 끝내고 삼겹살이라도 함께 구워 먹자!"
막내는 그간 코로나 때문에 함께 일하면서도 갖지 못했던 회식도 하자며 껄껄껄 웃었다.
막내는 그날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 기분이라면 우리 셋이서 함께 뚫지 못할 어려움이란 없을 것만 같았다.
나와 4살 터울인 막냇동생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다.
그냥 동생이 아니다.
때로는 든든한 오빠 같고, 때로는 다정한 연인 같고, 또 때로는 엄격한 스승 같기도 했다.
힘들 때면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그늘이었다.
그런 그를...
그 소중한 막냇동생을...
나는 다음날 잃었다.
2021년 10월의 마지막 날 일요일,
막내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이 세상에서 떠나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채 식지 못하는 유골함을 안고서도 나는 그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 충격과 슬픔, 고통의 크기는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는... 세상이 무너져도 다시는
막내를 볼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무너져 내렸다.
매일밤 자책과 미련, 후회와 그리움이 범벅이 된 채
끓어오르는, 터져 나오는 통곡을 수백 번 수천 번 토해냈다.
술을 들이붓지 않고서 맨 정신으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두 달 만에 11kg이 빠졌다.
나를 몰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몸과 영혼은 더없이 앙상해져 갔다.
여전히 후들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나는 얼마 후 다시 골프 연습장을 찾았다.
나는 골프를 그만둘 수 없었다.
막내가 떠나기 전날 밤의 그 환한 미소를 지울 수가 없다.
막내는 내가 골프를 잘 치기를 그토록 바랐다.
내가 골프를 배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진심 어린 응원을 해준 이가 바로 막냇동생이다.
"막내야, 나 정말 7번 아이언으로 70m, 80m 보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럼 당연하지. 누나는 정말 잘할 수 있어. 난 믿어!"
언제나처럼 막내는 내게 용기를, 희망을, 꿈을 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골프를 누나와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그렇게나 기뻐하던 막내였다.
그래서 난 골프를 그만둘 수가 없다.
세상엔 결코 잊힐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움'이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그리움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내고 버텨낸다.
그 고통과 아픔을 잊어서가 아니라 '견뎌내면서' 말이다.
내가 골프를 그만두지 않는 진짜 이유.
바로 그 절절한 그리움 때문인 것을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