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미선 May 01. 2024

1981년 어느 추운 겨울날

빚에 쫓겨 흙벽집으로 내몰려 오다

그날, 눈발이 흩날렸다.

너무나 추웠다. 

빨갛게 얼어붙은 양 볼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 다섯 식구를 실은 작고 낡은 용달차는 덜컹덜컹 비포장 도로를 하염없이 달렸다.

어린 두 동생은 운전석 옆에 나란히 앉았고,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짐칸에 찌그러진 듯 구겨져 있었다.  

짐칸에 실린 세간살이라고는 낡아빠진 찬장과 이불 몇 개, 추레한 옷들이 전부였다. 

당시 열 살이던 나는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눈물을 쉼 없이 쏟아내는 엄마에게 나는 물을 수 없었다. 

"여보... 괜찮아. 걱정 마오."

아빠가 엄마를 위로한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듣자 엄마는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엄마의 울음소리와 덜컹이는 용달차 소리가 마구 뒤섞였다.

4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난 그 소리를 아프게 기억한다. 


이사하기 며칠 전, 집에 낯선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무뚝뚝하고 날랜 몸놀림의 사내들은 그야말로 거세게 들이닥쳐서 온 집안을 쑤셔놓았다.  

빨간딱지가 여기저기 붙었다. 

더 이상 이 모든 것들이 우리 것이 아니란다. 

엄마의 화장대에도, 즐겨 보던 TV에도, 옷장에도, 신발장에도...

덕지덕지 붙은 차압 딱지들은 소름 끼치도록 두렵고 무서운 부적 같았다. 


그 집은 엄마가 처음으로 가진 '우리 집'이었다. 

이천의 아주아주 깡촌 시골동네.. 

도시가스란 말은 생판 들어본 적도 없고, 수돗물도 없는 동네.

병원이나 슈퍼마켓 따위는 사치였고, 

가까운 장호원읍으로라도 나가려면 1시간을 걸어 하루에 두어 번 들어오는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던, 

정말 깡촌에 우리 집이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마루도 없이 덜렁 방 두 개가 붙어 있고, 

마당 한편에 있던 아주 자그마한 창고와 재래식 화장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엄마는 더없이 행복해했다. 

'우리 집'이라는 말이 주는 그 든든함을 엄마는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행복은 딱 2년뿐이었다.

왜 우리가 안성으로 쫓겨 와야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나는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릴 적, 빚보증 같은 단어를 엄마아빠가 나누던 대화에서 얼핏 들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엄마와 그 일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엄마의 가슴 한쪽 편, 돌덩이처럼 무겁게 누르는 그 아픈 기억을 

나는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갑자기 흘러들어 온 곳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안성이라는 작은 도시다.

우리는 엄마의 외할머니댁으로 쫓기듯 들어왔다. 

그랬다. 

돈이 없어 갈 곳도 구하지 못했던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이곳으로 쫓겨온 것이다. 

증조외할머니댁 마당 구석에 붙어 있는 다 쓰러져가는 단칸방 흙벽집. 

우리가 앞으로 살 곳이라고 했다. 

구멍 뚫린 문풍지를 발라놓은, 대충 달아놓은 방문은 나조차도 구부정하니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 

흙으로 바른 벽엔 누우런 신문지가 벽지를 대신했고, 바닥은 싸늘했다. 

텅 비어 있었다. 

엄마는 외증조할머니와 이모할머니 손을 잡고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텅 빈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도 두려웠다. 

어쩔 수 없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저앉아 울었다.

한참을...

열 살 소녀는 그렇게 가슴에 커다란 상처들을 담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루함은 나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