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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노네 Jan 16. 2024

6. 어떤 이방인의 삶

호주에서 살아남기

시드니 에픽하이 콘서트

에픽하이가 호주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해서 셀레나와 함께 티켓을 구매했다. 새삼 K-pop의 인기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이 콘서트가 인생 첫 콘서트 방문이기도 했는데, 나는 내가 외향인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남들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방방 뛰고 있었다. 앞으로 콘서트나 페스티벌같은 문화생활을 종종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셀레나 집에서 슬립오버 한 날

 하루는 우리들의 아지트 '빽가네'에 갔다. 셀레나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한식당이다. 시티내 한식당 중 그나마 맛과 퀄리티가 좋아서 자주가던 곳이다. 셀레나가 떠나기 전 자기 집에서 슬립오버(sleepover)하는 거 어떠냐고 제안해서 셀레나 집에서 함께 잤다. 침대가 하나 뿐이라 이불 여러겹을 깔아 나름 그럴싸한 침대를 만들어주었다. 새벽 4시까지 미스터선샤인을 보며 떠들고 놀았다. 


호주에 살면서 한국문화의 인기를 실감할 때가 많다. 셀레나와 만날 때면 대부분 한식당을 가거나 한국드라마를 보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많고, 달링하버에 가면 kpop 랜덤 플레이 댄스를 하거나 춤연습을 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 클럽에서도 흘러나오는 강남스타일 등. 심지어는 한국인이라고 하면 더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럴때마다 나는 마치 k-pop과 k-beauty에 아주 푹 빠져있는 전형적인 한국인 소녀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듦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그들의 문화도 찬사를 해주어야할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그러나 나는 한국사회에서 자라 한국노래를 듣고 한국문화, 화장법에 익숙할 뿐 어떤 그룹의 노래가 언제 나오며, 어떤 그룹의 멤버 수가 몇명이며 누가 누구인지, 어떤 스킨케어가 어느 피부유형에 적합한지 줄줄이 꿰고 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된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하지만 대화의 흐름이 내내 한국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적당히 떠들어준 뒤 화제를 바꾸는 편이다. 물론 우리 문화가 대중화되고, 나를 더이상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먼저 인식해주는 것은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근무하는 한글학교에서 한국문화체험행사를 열었다. 다양한 액티비티를 통해 한국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취시킬 수 있는 자리이다. 나는 우리나라 태극기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 태극기를 만들어본 다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 집에 왜왔니, 비석치기와 같은 한국 놀이를 알아보고 직접 게임해볼 수 있도록 계획했다.


여기 있는 학생들 모두 자아는 호주인일지 몰라도 생김새는 한국인이다. 사실 워낙 이민자가 많은 호주라 겉모습만으로 호주인인지 투어리스트인지 구분할 수는 없지만, 겉과 속이 다른 이 아이들은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많은 생각을 일으킨다. 외국에서 나고 자랐다거나, 유학을 했다거나, 해외에서 산 세월이 어마어마하게 길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일 평생을 외국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얕은 환상, 꾸준한 관심을 둔 사람으로서 호주 사회는 그야말로 연구 대상이다.


전 이야기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호주는 인종별로 뭉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고 느꼈다. 같은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민자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이나 인도인이 운행하는 우버나 편의점처럼 왜 특정 인종이 특정 직업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지는 늘 궁금증을 자아냈다. 내가 호주를 떠날때 쯤에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마 아주 오래전 그들이 처음 이 땅에 정착할 때 쯔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별다른 진입장벽없이 할 수 있었던 일이 조금씩 굳혀져 온 걸지도 모르겠다고.


태극기를 색칠하는 학생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곳에 처음 부임하고 학생들의 서류를 쭉 읽어보다가 입학원서에 부모님의 직업을 쓰는 칸을 보게 됐다. 대부분 동양인 이민자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직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민이라는 제도가 노동자를 필요로하는 국가와 더 나은 삶(복지, 워라밸)을 갈망하는 노동자 사이의 수요와 공급의 일치라고 본다. 그래서 큰 틀에서 볼 때 이는 인종과 국적간 새로운 계급사회를 재생산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일단 이민자를 수용하는 직업군은 대개 인력이 부족한 직군이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다시말해 로컬들이 기피하는 직종이라는 이야기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그 나라의 이민 직업군에 해당한다면 참 좋은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보통은 유학의 길에 오른다. 현지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몇년간의 졸업생 비자를 받아 일하는 게 가능하고 운이 좋다면 고용주의 스폰을 받아 이민이 가능하니까. 그러나 이렇게 정석적인 루트를 타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석적인 루트를 타더라도 이민의 길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학생비자'를 학위 취득용 보다 거주 연장용으로 사용한 경우가 더 많았다. 더이상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기 어려운 경우 학생비자를 발급받아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비자는 말그대로 학업을 위해 입국하는 유학생들을 위한 비자로 주당 20시간의 근무만 허용한다. 그래서 그 이상근무를 원할 경우 고용주와의 합의 하에 캐쉬잡으로 돌려 일을 하는 것이다.


 호주 같이 최저시급이 높은 국가에 오래 머무르며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학생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등록하는 비즈니스 스쿨이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진짜 대학교라기 보다는 전문학교의 형태로, 등록금을 내고 수업은 온라인으로 듣거나 주 1-2회 정도 대면출석만 하면 된다고 한다. 이런 비즈니스 스쿨에 등록하여 학생비자를 발급받고 남는 시간에는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조건이 딸린 상태에서 전문적인 일을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비로컬들이 카페나 식당같은 서비스 직군에 종사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생비자가 저럼한가? 그것도 아니다. 물론 내가 목적으로 하는 것이 돈 혹은 영어 같이 뚜렷하다면 방식이야 이렇든 저렇든 어떠하겠는가. 어떻게든 여기 머물면서 높은 시급 받으며 잔고만 불리면 그만이니까. 실제로 보았다. 주 7일 일하며 한달에 만불 벌던 친구를. 그치만 아무 생각없이 단순하고 낙천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1인으로서 이런 시스템은 비자 발급비로 호주 정부의 배만 불려주고 적당히 비숙련 직업군에 종사하면서 삶을 이어나가는 걸로 밖에는 안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워홀이나 이민이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만 품어주는 불합리하기만한 제도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비방할 의도도 전혀 없다. 지극히 나에게 해당되는 의견일 뿐) 여전히 워홀은 청년들에게 한 번 쯤 추천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이런 복잡하고 어두운 이야기만 제외하면 나도 호주 생활을 꽤나 즐기고 좋아했으니까. 이민도 기회와 자격이 주어진다면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워홀에는 정답이 없지만, 의도치 않게 한국인보다 로컬 혹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더 어울리며 "나름" 호주 사회에 스며드는 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나는 이러한 이유로 호주를 시작으로 모든 영어권 나라에 워홀 투어를 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했다. 워홀을 통해 더 넓은 세계와 그 이면을 동시에 들춰본 기분이랄까. 더이상 내게 젊은 날을 "이방인"으로서 이곳저곳을 헤맬 명분을 없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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