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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이야기 13 – 거제에서의 문화생활

by 정인성

거제로 이사 오기 전엔 몰랐다. 이 조용한 섬에서 내가 이렇게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게 될 줄은. 물론 문화란 말 자체가 워낙 넓은 의미를 갖고 있어서, 음식도 문화이고 책 읽기도 문화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는 문화생활은 클래식 음악 공연, 연극과 뮤지컬, 영화 관람, 전시회 같은 예술 중심의 경험들에 한정된다. 서울에 살 땐 항상 무언가를 쫓듯이 공연장을 가곤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더 여유롭게, 더 깊이 있게 문화 속에 잠길 수 있어서 좋다. 그 변화는 생각보다 큰 기쁨으로 다가오곤 한다.


클래식 음악을 최고의 음악당에서 – 통영국제음악당


거제 우리 집에서 차로 40여분쯤 달리면 통영의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뚝 선 건물이 하나 나온다. 통영국제음악당.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다. 이 정도 규모의 클래식 전용 공연장이, 그것도 세계적인 수준의 음향을 자랑하는 홀이 거제의 옆 동네인 통영에 있을 줄이야. 실제로도 이곳은 국내 최고 수준의 음향의 질을 가진 홀로 알려져 있다.


통영국제음악당의 공연은 연중 계속되나, 특히 매년 4-5월에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와 11월에 열리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를 통해 나는 거제에 살면서도 세계적인 연주자들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한 예로 지난 3년간 임윤찬의 연주를 3번이나 즐길 수 있었다. 티켓 예매는 서울보다 훨씬 수월했다. 회원권 덕에 예매 오픈 시점에 접속만 잘하면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좋은 자리도 10만 원을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서울 같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첼리스트 한재민, 러시아 출신의 알렉산드르 말로페예프 같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연주자들이 자주 이곳 무대에 선다. 예전 같으면 유튜브로나 볼 법한 무대들을 실제로 보는 순간, ‘이게 지방의 삶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통영음악당룸.jpg 사진: 통영국제음악당의 뷰가 멋진 연주자 대기실 - 귀한 기회가 있어서 볼 수 있었다.
통영음악당 임윤찬.jpg 사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감상
통영음악당프로그램.jpg 사진: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임윤찬 씨의 스승인 손민수 씨 연주까지... 호사 호사!

공연 전후에 음악당 앞의 전망대로 나가면, 통영 앞바다 위로 유람선과 요트들이 지나가고 햇살에 비친 바닷물이 아름답게 빛난다. 음악과 바다. 이 조합만으로도 이미 마음의 치유가 되고 기쁨이 샘솟는 느낌이 든다.

통영음악당 앞바다.jpg 사진: 통영국제음악당 앞바다

음악당 근처엔 맛집도 많다. 공연 전이나 후에 생선구이나 멍게비빔밥 같은 식사를 곁들이면 그날 하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가 된다. 혹시 통영이나 거제를 방문하시게 되면 통영국제음악당의 공연 일정을 함께 체크해 보기 바란다. 혹 공연을 볼 수 없더라도 음악당을 방문해서 시원한 뷰와 함께 산책을 즐겨보면 좋을 것이다.


거제 내에서 즐기는 다채로운 공연 – 거제문화예술회관


거제문화예술회관은 장승포 언덕 위, 아주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품은 길을 지나 그곳에 도착하면, 우뚝 자리 잡은 이 회관이 반긴다. 대극장과 소극장, 전시장까지 갖추고 있어 공연이나 전시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수시로 열린다. 국제적인 분들이 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회관이 제공하는 프로그램들 덕분에 거제의 생활이 더 활기차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주차는 거의 스트레스가 없을 정도로 넉넉하고, 입장 줄이나 혼잡한 인파도 없다. 공연 시작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해 아래층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입장하면 된다. 서울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여유다.

거제문화예술회관앞바다.jpg 사진: 거제문화예술회관 앞으로 장승포항과 바다가 보인다. 시원한 풍경.

기억에 남는 공연은 많다. 2022년 겨울, 바르나 국립발레단이 와서 ‘호두까기 인형’과 ‘백조의 호수’를 공연했을 때는 무대는 작지만 몰입감은 컸다. 가까이서 보이는 무용수들의 표정과 호흡, 그리고 무대 위 생생한 움직임은 대형 공연장보다 오히려 더 인상 깊었다. 뮤지컬 ‘맘마미아’ 전국 투어 공연도 이곳에서 다시 한번 보았다. 박애리와 팝핀현준의 ‘겨울이야기’는 감동적이었고,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김유빈과 KBS교향악단의 연주도 훌륭했다. 거제의 음악 동호회나 전문 연주자들의 정기 연주회도 종종 열린다. 무료인 경우도 많고, 대부분 1만 원에서 3만 원 정도면 표를 구할 수 있다. 서울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우리 부부는 대개 친구 부부와 함께 간다. 공연을 본 뒤엔 장승포항 근처 맛집에서 식사를 하며 공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회관에서 항구까지는 걸어서 간다. 생선구이집도 많고, 간단한 이자카야 스타일의 술집도 있다. 예술의 감동에 이어 입까지 즐거운 밤이 된다.

거제회관 프로그램2.jpg 사진: 거제문화예술회관의 수요음악회 프로그램
거제회관 프로그램1.jpg 사진: 거제문화예술회관 음악회에서 - 현재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수석인 김유빈 플루티스트와 함께

이 회관은 단지 공연장이 아니라, 거제의 문화 사랑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공간이다. 프로그램에 따라 어린이들, 청소년들이 많이 와서 같이 공연을 즐기는데, 그들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곤 한다. 공연 중간에 들려오는 관객들의 숨죽인 감탄, 끝나고 무대 위로 흔들리는 박수. 그런 순간들을 통해 여기는 ‘문화가 있는 일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아주 편하게


거제 시내 장평동엔 CGV 영화관이 하나 있다. 디큐브 백화점 안에 있는 이 극장은 예매가 거의 필요 없다. 그냥 상영 시간 맞춰 슬슬 가면 된다. 서울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린 오히려 20분 거리의 통영 롯데시네마를 자주 간다. 이유는 단순하다. 리클라이너 좌석이 있는 상영관이 있기 때문이다. 거의 눕다시피 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그 편안함과 영화관내 좌석 수가 많지 않은 관계로 인한 여유로움 이야말로 영화 보는 재미를 배로 만들어준다. 서울이나 동경에 살 땐 영화관에 갈 일이 드물었고, 있어도 번거로웠다. 주차는 늘 복잡하고, 상영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여기선 문득 "좋은 영화 상영 시작하였다 던데 오늘 보러 갈까?" 하고 차를 몰고 나서는 게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영화관은 결국 집이다. 우리 부부는 거실에 TV를 두지 않고, 방 하나를 미디어 룸으로 꾸몄다. 넷플릭스 등 여러 OTT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거의 무한정이다.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나 추천받은 영화를 둘이 과자 한 봉지랑 따뜻한 차 한잔하면서 즐긴다. 중간에 잠깐 멈추고 얘기 나누기도 하고, 졸리면 잠깐 눈도 붙이고. 별일 없는 늦은 오후나 주말이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미디어룸.jpg 사진: 우리 집 미디어룸 - 작지만 아늑하고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조용히, 그림 앞에 머물다 – 거제의 갤러리들


서울처럼 많지는 않으나, 거제에도 멋진 갤러리들이 있다. 이름 있는 작가들이 오가고, 지역 화가들이 활발히 활동한다. 내가 아는 대표적인 곳이 거제면에 위치한 ‘갤러리 거제’.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꽤 활발하게 전시가 열리는 곳이다. 부산, 대구, 서울 등의 작가들과 교류도 활발하고, 아이들을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도 종종 운영한다. 또 하나는 ‘태은갤러리’. 1관은 외포항 근처 어촌 마을에, 2관은 고현동 시내에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스레드를 보면 요즘 어떤 전시가 열리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1관은 어촌 마을의 풍경과 어우러져 전시장 자체가 그림 같다. 집에서 멀기는 하지만 정취가 있는 외포의 태은갤러리를 특히 좋아한다.

태은갤러리1.jpg 사진: 태은갤러리 1관의 앞마당에서..
태은갤러리2.jpg 사진: 태은갤러리에서 전시한 김형길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

이사 온 첫 두 해는 정말 열심히 전시를 보러 다녔다. 관장님들과 차도 마시고, 작가들과 대화도 나누고. 전시 하나하나가 마치 작은 여행 같았다. 그런데 점점 마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예전처럼 작품을 구매하지 않게 되면서, 그냥 보기만 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져, 갤러리 방문이 뜸해지고 있다. 집엔 이미 옛날에 사놓은 그림들이 많아 더 이상 걸 공간이 없기도 하고. 서울의 갤러리들은 그런 부담이 없다. 관람객도 많고, 익명성도 있으니까. 그래서 요즘은 전시는 옆 동네 통영이나 서울 방문할 때 가게 된다. 조금 아쉽기는 하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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