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주말에 한파가 찾아온다는 예보답게 집안에 냉기가 급속하게 흘렀다. 종일 해는 구경 못하겠다 싶은 날씨가 오후까지 지속되었으며 간간이 눈발까지 흩날렸다.
이런 날 꼭 오름에 가야 할까, 미친 짓인가, 감기나 걸리면 누굴 탓해야 하나 등등 온갖 핑곗거리를 동원하여 가지 말아야 할 구실을 찾느라 머리를 굴렸다. 내 놀이터인 방구석에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시내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각났다. 불현듯 수선 맡긴 바지 한 벌을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겸사겸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간다고 가"라고 혼잣말을 하며 차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금오름으로 가는 길에 하늘은 낮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녁도 아닌 어설프게 어두운 하늘이었는데, 머리 위에 내려앉은 무거운 검은 구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림을 향하는 도로에서 우회전으로 꺾어 길게 뻗은 아스팔트를 따라 차는 달렸다. 금오름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스팔트 바닥에 닿는 눈가루가 연기처럼 모여 바람 따라 움직였다. 가끔 무식해서 겁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는 웃음이 나왔는데, 이런 날 산에 간다는 내가 오늘따라 정말 무식해 보였다.
금오름 입구에 차를 주차시키고 밖을 내다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까이에 관광객일 것 같은 가족이 올라가고 있었다. 어린애를 데리고.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나는 가족들이 걸어가는 곳으로 다가가 어찌 보면 일행처럼 무심하게 보조를 맞추며 걸어 올라갔다. 날리는 눈발이 눈앞으로 날려 사납게 느껴졌다. 길이 지나는 곳마다 날린 눈이 머물러 쌓였다.
자주 다녀서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던 길은 군데군데 하얗게 색을 넣어 선명하게 그어져 아름다웠다.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도 새로움이 있었다. 정상에서 가쁜 숨을 쉬면 나는 혼자 말했다.
"오늘 하기 싫은 일을 해냈으므로 나는 성공했다."
성공은 너무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옆에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왕왕往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