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천재
지난주 금요일이 생일이었다.
재작년 생일에 혼영으로 <바튼 아카데미>을 보고 참 좋았던 추억이 떠올라, 올해 생일에도 셀프 이벤트로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왠지 또 인생 영화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 (예상적중♪)
그렇게 별생각 없이 예매한 영화가 《미키 17》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할리우드 SF 작품이라는 정도만 알고 갔다. 잔인하고 불쾌감을 주는 영화를 꺼려 해서 <살인의 추억> 외에 그의 작품은 모두 패스 ^^;;
왜 이 영화는 볼 마음이 생긴 거지...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미키'라는 제목을 '럭키'로 인식했던 것 같다. "럭키미키"한 유쾌함을 무턱대고 내 맘대로 감지해버렸다.
포스터의 로버트 패틴슨도 한몫했다. 트와일라잇의 주인공 배우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다른 얼굴일 수 있다니! 게다가 설명할 수 없는 그의 표정은 또 어떤가. 기묘하게 멍청하고 찌질하다. 정신병자일 것도 같고, 순수해 보이는 것도 같다. 특별하게 얼굴 근육을 크게 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가 있지? 여러모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라 무의식적으로 티켓을 끊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올해 생일도 영화 한 편으로 꽉 채워진 기분이었다.
또 보고 싶을 만큼 만족스러운 미키의 성장 스토리 《미키 17》.
잔인한 장면도 괜찮았다. 타이밍에 맞춰 시선을 잘 피한 덕분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유머러스해서 타격감이 적었다. 15세 이상 관람가라 해도 우리 아이들에게 선뜻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뿐, 성인은 누구나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미키 17》 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SF 장편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다. 복제인간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이야기로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계급 간의 모순을 파고든 작품이다. 사람이 "종이처럼" 프린트되어 복제된다는 설정과 "계급 간 모순"이라는 주제까지 다 봉준호 감독님에게 매력으로 다가갔을 것 같다.
<설국열차>나 <기생충>도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은 영화로 알고 있어, 감독님 전문 분야인 듯한 지점들이 이번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미키 17》 은 <옥자>를 같이 제작했던 브래드 피트 소유의 플랜 비 엔터테인먼트가 감독님께 소설의 축약본을 건넸다고 한다. 《미키 17》 은 그렇게 감독님이 처음으로 제안받아 찍은 영화가 되었다.
살인하는 과정을 음미하는 낙으로 사는 사채업자를 피해 미키는 지구를 떠나기로 한다.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실험용 인간으로 끝없이 죽고 다시 프린트되어 살아나길 반복하는 근로자, 인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에 지원해 무려 1: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다. (범죄자에게 강요할 작정이었던 직급)
얼음행성 니플하임으로 항해하고 도착하는 4년 동안 미키는 16번을 죽는다. 우주 어디에도 이렇게까지 극한 직업이 없을 텐데, 미키는 매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어낸다. 가스를 마시고, 온갖 약물 주입으로 피를 토하고, 방사능에 피폭되고, 얼어 죽고, 15분 만에 죽어 다시 프린트되기도 한다. 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여자친구 ‘나샤’가 있다.
어느 날, 얼음 구덩이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오니, '미키 17'이 당연히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같은 인간이 둘이 되는 '멀티플' 상황이 되면, 둘 다 영구 삭제된다. 게다가 '미키 18'은 기억 전송 과정에서 직원의 실수로 잠깐 오류가 있었던 탓인지 매우 충동적이고 공격적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숙맥 같은 '미키 17'은 무사할 수 있을까?
<이후 스포스포 있습니다.
마음껏 풀어놓을 작정입니다.>
《미키 17》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장 인상적인 점부터 꺼내보자.
<트와일라잇>의 로버트 패틴슨만 알고 있었다. 판타지 로맨스 영화이니 주인공이 매우매우 중요한데, 그는 내 취향도 아닌 데다 연기력도 그닥이어서 그저 그런 배우로 곧 잊혔다.
그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보오!
"아카데미 위원회는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 두 개를 주어라!" 박찬욱 감독님의 말씀이다. 로버트 패틴슨은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기술적으로도 대단한 연기다.
그중 보이스오버(화면에 보이는 영상에 대해 설명하는 내레이션 목소리. 영화 전반에서 미키는 자신의 목소리로 속마음을 관객에게 들려준다.)로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충격이었다. 목소리로 인물의 성격이 곧바로 파악될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듬어졌지만 본래 배우의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음성이었다.
알고 보니 로버트 패틴슨은 목소리 만들어내는 걸 좋아한단다. 다양하게 여러 목소리를 시도하며 녹음하다가 불현듯 '이거다!' 싶을 때가 온다. 역할에 딱 맞으면서도 즐겁게 연기할 수 있는 목소리를 찾으면, 그때부터는 자기 자신을 흐름에 맡긴다니 화면 뒤편에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는 면모가 놀라웠다. (그래, 저런 설정이 거저 나올 리가 절대절대 없지.)
목소리뿐 아니라 그냥 보기만 해도 미키 17과 18은 구분된다. 작은 몸짓부터 모든 디테일이 달랐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찌질한 미키 17은 어깨가 말려서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자세 그 하나로 그저 미키 17 이었다. 주저하고 흔들리는 수동적인 미키 17의 눈빛과 달리 생각할 틈도 없이 튀어나가는 거침없는 미키 18의 눈빛은 레이저 같았다.
어쩌면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라 상대적으로 표현하기 수월했을 것도 같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다른 인물을 동시에 창조하고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로버트 패틴슨에 흥미가 생기면서 인터뷰를 여럿 찾아봤다. 눈에 띄는 태도가 하나 있었다. 엄청난 대사량에다 1인 2역이다. 또 휴먼 프린터에서 툭 떨어지고, 불구덩이에 버려지고, 싸우고, 달리는 등 몸 쓰는 장면이 상당히 많아 고됐을 것이다.
"하루에 커피를 17잔씩 마시면서 일하느라 매우 피곤하고 유령이라도 볼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서도, 시종일관 그는 "fun, fun" 촬영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거듭 말한다. 홍보 목적에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힘든 가운데서도 즐길 줄 알고, 자기 자신을 믿고 배역에 빠질 줄 알고, 하면서 배울 줄 아는 멋진 배우였다.
<직관의 폭발>이라는 책을 서평한 적이 있다. 로버트 패틴슨이 대표적인 인물로 꼭 들어맞는 것 같다. 과제에 대해 "왜? 어떻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다양하게 실험한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무의식적이고 자유로운 분산의 힘을 종합해 직관적 사고를 한다. 직관을 발휘할 때, 여유롭고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 모든 과정이 그의 연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다.
디너씬에서 배양육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장면이 있다. 미키가 맛없는 프로틴 조각이 아닌 식사 다운 식사를 오랜만에 갖는 자리라 허겁지겁 마구 욱여넣으면서 먹어야 하는데, 소품팀에서 구해 온 재료가 수박이었다고 한다. 3일 동안 공들여 찍느라 폰즈 소스를 뿌린 수박을 40통은 먹었을 거라며 수박에 진저리가 나는 표정을 지었다. (ㅋㅋㅋ) 배우 역시 참으로 극한 직업이다.
그런데도 영화를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제안하더라. 휴먼프린터에서 미키가 가래떡 뽑듯 복제된다. 그런데 직원들이 딴짓하느라 받침대를 설치하지 않아 몸이 휘어져 나오는 장면이 있다. 감독님은 여기서 그치려고 했는데, 로버트 패틴슨이 미키를 아예 떨어뜨리자고 해 연체동물처럼 바닥에 널브러지는 재미있는 장면이 탄생했다. (나체... 뒷모습... ^^;;;)
같이 출연한 배우들도 로버트 패틴슨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겸손하다. 겉으로는 되게 여유로워 보이는데, 수면 아래에서 오리처럼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매일 현장에서 차근차근 캐릭터를 쌓아간다."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확신이 엄청 강한 사람이다." "캐릭터에 스며드는 법을 정말 잘 안다. 투사에 두려움이 없는 듯, 항복하듯, 역할에 자신을 맡기는 걸 아는 것 같다. 그 과정이 힘든데 그는 그냥 쑥 들어간다."
로버트 패틴슨에 대해서만 쓰고 정작 영화 얘기는 하지 못 했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ㅎㅎ
다음 그의 차기작이 개봉되면 꼭 찾아볼 것 같다. 앞으로 그의 행보에 기대 가득 품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아야지.
멋진 연기로 전 세계에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버트 패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