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게 하는 마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운명과 싸워 얻어낸
이 모든 순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그 소중한 순간들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349면
기욤 뮈소가 쓴 장편소설 《센트럴파크》는 2014년에 초판이 출간됐다. 출판사는 10년 동안 달라진 맞춤법에 따라 일부 어휘를 고치고, 시대 변화상에 맞춰 대화문을 교정한 뒤 개정판을 다시 선보였다.
기욤 뮈소의 소설들이 최근 들어 비슷한 느낌의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시리즈처럼 출간되고 있다. 아직 그의 팬까지는 아닌데 왜 다 끌어모으고 싶을까.
《센트럴파크》는 기욤 뮈소의 11번째 장편소설이다. 판타지와 로맨스를 결합한 스타일이 그의 강점이지만, 그는 이 책으로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에 도전했다. 그리고 성공한다. 프랑스 자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기욤 뮈소의 변신은 대성공이라는 찬사를 이끌었다.
초등학생 때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로 독서를 시작한 내게도 이 책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반전들이 상상을 뛰어넘는다. 치밀한 전개와 플롯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인 기발함과 구성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손을 놓을 수 없는 긴장감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다른 생각을 전혀 못 할 정도로 몰입했다. 어린 시절 그때의 내가 이렇게 책에 빠졌었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요즘 나는 소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야기 속 전혀 다른 세계에 빠져들면 현재의 나는 사라지는 기분이 괜히 불편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내가 흐릿해지는 대신 한 사람의 고통 안으로 내가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독자와 이야기를 이질감 없이 묶어내는 소설의 힘 덕분이었다.
"몸을 반쯤 일으킨 알리스는 그제야 자신이
숲속의 통나무 벤치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건장하고 다부진 남자의 몸이 옆구리 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알리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며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
알리스는 앞쪽으로 몸을 숙여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
설마 시체는 아니겠지?"
- 11~13면
38살의 파리 경찰청 강력계 팀장 알리스.
옆에 누워있는 남자는 미국인 재즈피아니스트 가브리엘. 그는 어젯밤 아일랜드 더블린, 재즈클럽에서 공연을 마치고 취한 이후로 기억이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8시에 뉴욕 센트럴파크 한가운데서 같이 눈을 뜬다. 손이 하나씩 수갑에 묶인 채로.
"알리스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가브리엘과 나는 왜 지난밤에 벌어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까?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서로 수갑으로 묶인 채 누워 있게 되었을까? 셔츠에 묻어 있는 혈흔은 누구의 것일까? 낯선 권총은 어떡하다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탄창의 총알이 한 발 비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내 손바닥에 그리니치 호텔 전화번호를 적어두었을까? 가브리엘의 팔에 숫자를 새긴 사람은 누구일까? 서류 가방에는 왜 전기충격장치가 들어 있었을까? 주사기 안에 들어 있는 파란색 액체는 뭘까?
알리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 때문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137면
우리는 진실을 원하지만,
우리 안에서 찾아내는 거라곤 불확실성뿐이다.
- 블레즈 파스칼
불확실한데다 결코 불가능한 일들이 동시에 휘몰아친다. 이 모든 복잡한 설정과 사건들이 단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니!
수많은 서스펜스의 떡밥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회수해 준 작가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미스터리 스릴러로 시작해 심리, 관계, 정체성, 결국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로 접근하는 전개는 '서스펜서 마스터'다웠다.
수사를 진행할수록 오히려 더 미궁에 빠지며,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독자를 이끌고 가는 기막힌 솜씨! 챗 GPT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센트럴파크》는 겉은 추리물, 속은 심리극, 마무리는 드라마였다. 캐릭터와 서사뿐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까지도 빈틈없이 설계된 미스터리였다. 결국은 사랑으로 모든 이야기가 모여드는 결말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머리도 쓰고, 마음도 울리는 소설을 원한다면 완전 취향 저격일 소설!
"우리의 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지닌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아주는 당신의 반쪽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등을 토닥여주고,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
-91면
"우리의 생에는 하나의 문이 열리며 환한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의 마음을 굳게 걸어 잠갔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은 무중력 상태에서 두둥실 떠다니는 존재로 거듭난다. 당신의 생은 한동안 장애물이 없는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선택은 분명해지고, 대답이 질문을 대체하고, 두려움은 사랑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우리의 생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92면
"나는 기억한다.
2011년 11월 21일에 자만심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는 지나친 만용을 부리다가
내 아기와 남편을 죽게 한다."
-161면
주인공 알리스는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갖는다. 그러나 아이는 배 속에서 연쇄살인범에 의해 죽게 되고, 같은 날 남편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끔찍하리만치 비극적인 불행을 겪은 알리스. 살아갈 이유를 모두 잃은 그녀가 인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돌봐준 사람들이 있었다.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 속에서도, 살아 있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사랑하고, 살아갈 이유를 만든다. 사랑이 없다면 절망은 고통이지만, 사랑이 있다면 절망은 시작이다.
고난 앞에서 도망만 가고 싶은 소심이라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결단력 있고 용감한 알리스 앞에서 삶을 직면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알리스가 과거를 회피하지 않게 붙들고, 스스로를 용서하며,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는 이 소설에서 진짜 반전은"누가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포기하지 않았는가"였다.
"알리스가 잃어버린 것은 기억일까, 마음일까?"라는 질문을 쥐고 읽는다면, 일시정지되는 순간들을 더 자주 경험할 수 있을 거라 귀띔해 주고 싶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지만 누군가를 살게 한 마음은 삶의 일부로 남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건 알리스와 그녀의 사람들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