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꿨던 날은 온다.
(페이스톡)
네모난 작은 액정으로 보이는 엄마와 신나게 얘기한다.
"엄마!! 내일 만나!!! 딸램 날라간다이!!!"
두번의 교육비행을 마쳤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레이오버 비행(목적지에 머물다 오는 비행)은 내 나라 한국이였다. 그것도 인천비행을 한달에 두번이나 받았다.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리고 모두 내게 말했다.
"Qatar loves her."
뭐지? 진짜야? 회사가 내 마음을 아는걸까?
사실 난 방전이 되어있었다. 꿈을 향해 달려왔고, 또 꿈을 이뤘지만 새로운 곳에 적응하며 몸과 마음의 여유없이 여기까지 숨이 차도록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 순간이 기다려졌다. 이 날만을 생각하며 지옥같은 트레이닝을 울며 버텼다. 향수병이 자연스럽게 탑재가 됐다.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립고 부모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물리적 거리가 어마어마했다. 내가 가고 싶을 때 못간다는 것.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 내 자유로 갈 수 없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인천 비행이 더 소중했다. 사실 한국에 있는 동생보다 카타르에 살고 있는 내가 부모님을 더 자주 뵀었다. 갈 수 있을 때 무조건 날아갔던 한국이었다. 가족들과 이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웃는다.
인천비행. 몇달전 잔뜩 겁먹고 쫄아 카타르로 향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한국인 승무원들을 처음 보며, 내가 저렇게 힘들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교육은 통과나 할 수 있을까? 했던 그 쫄보가 이제 승무원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어 간다.
꿈꿨던 날은 온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눈가가 촉촉했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말로 손님들께 인사했다. 어색했다. 얼마만에 하는 한국말인가! 반갑고 셀레었다. 무언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이토록 애국자였던가.
이때 나의 웰컴인사는 자본주의 미소가 아닌 찐미소였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60대쯤으로 보였던 어머님들이 "아유~ 예쁘다. 한국말 들으니 너무 반갑네." 하시며 엄청 반가워하셨다. 여행하시며 온통 외국어를 들으니 피곤하셨겠다 라는 마음이 천번만번 이해가 갔다. 나도 몇달만에 보는 한국인 승객이 너무 반가웠으니까.
들뜬 마음으로 탄 인천행 비행은 만석. 갈 때 8시간 반, 돌아올 때 11시간 반. 쉽지 않은 비행이었다. 한국인 승객들은 대체로 화장실 사용이 깨끗하고 나이스한 편이지만, 장거리 비행이기 때문에 서비스 절차가 많고 긴 시간동안 기절하는 승객 등 응급처치나 약을 드려야하는 승객들이 항상 있었다. 그렇다보니 브리핑 때도 여기에 관련된 질문을 하고, 비행동안 늘 긴장 상태에 있었다.
그렇게 8시간 반 걸어 인천도착.
"엄마! 내일 만나! 딸램 날라간다이!!"
어젯밤 출발 하기 전, 엄마와 영통을 했다. 그새 호로록- 날아와서 엄마를 보다니... 안고 손잡고. 엄마를 네모난 작은 액정이 아닌 실제로 보고 만지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그저 신기했다. 마음이 따뜻했다.
삼겹살, 술을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카타르에서는 못먹으니 삼겹살을 먹으며 맥주도 마셨다. 엄마와 카페는 자주 갔어도 이런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는데 덕분에 엄마와 특별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애틋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서는 같이 누워서 월드컵 개회식을 봤다.
"엄마. 너무 신기해. 나 저기 있었는데, 지금은 또 엄마랑 한국에 이렇게 누워서 월드컵 개회식 같이 보고 있네? 히히"
얼굴만 봐도 너무 좋은 시간. 엄마 손 꼭 잡고 잠이 들었다. 사실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1분 1초가 소중했다. 엄마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 이것저것 하고 싶었지만 내가 깨어있는 시간이 24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신과 체력이 너덜너덜해졌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다음날 밤 카타르로 바로 출발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만 했다.
다음날 나는 심하게 늦잠을 잤다. 잠이 많은 체질도 아닌데 비행을 한 후로 잠이 많아졌다. 엄마는 일부러 암막커튼을 그대로 두고, 해가 중천이 되도록 나를 깨우지않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점심시간이라 배도 고프셨을텐데 깨우지도 않고 기다린 엄마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 했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호텔을 둘러봤다. 사실 이 호텔은 내가 면접을 본 장소였다. 그때의 내가 떠올라서 가슴이 아려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래. 꿈꾸는 날은 온다.
될 때까지 하면 그만인 것도 알게 됐다. 그렇게 나는 승무원이 되었을 때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들을 하나씩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인천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며 근사한 조식도 함께 했다. 내가 꿈꾸던 순간이었다. 너무 뿌듯했다.
그런데 슬펐다. 아쉬움 그 이상의 슬픔이었다. 저 깊은 마음 한켠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다시 카타르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거 맞나..? 이렇게 사는게 맞나? 내가 원하던 꿈을 이룬 이 모습이 맞나? 뭐가 중요한 걸까?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공항에 모셔다드렸다. 헤어질 때 엄마를 꼭- 안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또 멀어지겠네.'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럴수록 씩씩하게 활짝 웃었다.
"엄마, 조심히 가요. 나중에 봐!"
뒤돌아서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나에게 인천비행은 제일 좋으면서도 제일 힘든 비행이었다. 이 순간 때문이었다.
터덜터덜 호텔로 돌아와서 한국음식들, 떨어졌던 생활용품들을 캐리어에 넣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캐리어가 닫히지 않을 만큼 꽉꽉 채워넣었다. 닫히지 않는 캐리어 위로 올라가 억지로 닫으며 생각정리, 마음정리를 했다. 무거운 캐리어만큼 내 마음도 무거웠다. 뜻대로 닫히지 않는 캐리어처럼 내 마음도 뜻대로 컨트롤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짐을 쌀때면 항상 나도 모를 감정이 실렸다.
스스로를 달랬다. 처음이라 그런거라며. 아직 적응중이라며. 나를 선택해 준, 내 꿈을 이루게 해 준 카타르에 감사하자며. 평생 있을 거 아니라며. 내 인생에 있어 잠시 점 찍을 이 곳 카타르라며. 언젠가는 그리워 할 수도 있는 곳이라며. 돌아올 때 후회없이 다 해보자며. 크게 보자며. 멀리 보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