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1961) 리뷰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지옥의 문> 상단에는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 자리한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모티프로 제작된 이 조각상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조각되어 있다. 벌거벗은 채 한데 뒤엉킨 인물들은 서로를 탐하는가 하면 밀어내기도 한다. 욕망과 분노, 쾌락과 정념이 한데 흐르는 이 소극의 중앙에는 다소 크게 조각된 한 인물이 앉아 있다. 그는 손으로 턱을 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생각한다. 서로를 물고 뜯는가 하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육신을 탐하는 인간들.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사유에 침잠하는 그의 이성은 그렇기에 극렬하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지성을 추동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1961)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한다. 감독은 영화의 서두에서 주제의식을 밝힌다.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작품이다.’ 곧이어 제목이 등장하고, 화면이 암전 되며 영화는 지옥의 문을 연다. 들어선 지옥의 첫 풍경은, 북적대는 술집과 취한 채 흐느적거리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다들 취해 있고, 어딘가 상처 입었으며, 조금씩은 미쳐 있다.
영화는 본격적으로 세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리를 다친 제대군인 경식(윤일봉)은 사랑했던 사이인 명숙(서애자)를 멀리한다. 전란 속 다리를 잃은 그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스스로 떠안는다. 자신을 짐짝이라 여기며 욕망을 억제하는 그의 결단은, 그러나 명숙이 양공주로 생활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호(최무룡)는 변변찮은 직업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내다.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흉터를 지닌 그에게 전쟁이 끝난 삶은 부조리하다. 사랑했던 연인은 살해당했고, 어느샌가 밀려든 자본주의는 벼랑 끝으로 삶을 내몬다. 조카는 학업을 놓은 채 신문을 배달하고, 여동생은 몸을 판다. 그는 죽은 연인의 총으로 세상을 겨누지만, 공모한 이들은 그를 배신하고 그의 총알은 결국 허공을 떠돌 뿐이다.
철호(김진규)는 치통을 앓는다. 계리사 사무소 서기로 일하는 그의 월급은 삶을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어머니는 전쟁통에 미쳐 ‘가자!’만을 외치며, 산기에 이른 아내는 출산 후 숨을 거둔다. 여동생은 몸을 팔고, 남동생은 강도 짓 끝에 수감된다. 끔찍했던 과거와 희망 없는 미래가 그를 짓누르며, 그 와중에 치통은 그에게 현재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그는 끝내 고통의 근원이던 이를 뽑는다. 닫힌 과거와 보이지 않는 미래, 그리고 뽑아버린 현재의 틈에서 그가 도착할 과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피를 머금은 입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가자’라는 무력한 외침뿐이다. 그는, 택시는, 총알은 그렇게 욕망과 분노, 고통과 부조리로 신음하는 서울 전역을 하염없이 떠돈다.
탄알은 과녁을 향한다. 과녁에 꽂힌 탄알은 뒤이어 숫자로 환산된다. 맞혔으면 1, 그렇지 않으면 0. 이 이진법은 통계로 처리되어 역사에 기술된다. 그러나, 과녁에 꽂히지 못한 이 0은, 그렇기에 끝없이 비행한다. 오발된 탄알들은 과녁과 과녁 사이를 누비며 지천을 떠돈다. 이 탄알들은 일제강점기의 과녁을 지나 전쟁의 과녁으로 향한다. 전후 혼란한 시대를 지나 군부독재와 새마을 운동이 적힌 깃발로 향한다. 80년대의 광주로 향하며, 90년대의 몰락한 기업들의 폐간판으로 향한다. 새천년을 맞이하고 월드컵의 열기를 지나, 참사와 비극, 혐오와 테러를 향한다. 무수한 과녁들이 자리하고 사라지며, 그 와중에도 탄알은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발사된다. 그 탄알이 지나는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 저열한 웃음과 광기 어린 괴성. 닳아헤진 채 관념이 되어가는 과녁들과 달리, 은빛의 탄알은 여전히 실재한다. 그들은 지난한 삶을 살아낸 인간들이다. 피를 머금은 철호이자 세상에 총구를 겨눈 영호이다. 끝내 아이 곁에 자리한 명숙이자 목발을 짚고 절뚝이는 경식이다. 그들은 저마다 어딘가로 향한다. 과녁 너머의 어딘가를 향해. 0이라는 숫자 너머의 세계를 향해서.
로댕의 동상은 여전히 생각한다. 그는 지옥과 같은 삶과 인간들을 바라본다. 그가 끝내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자신의 조각상을 망설임 없이 파괴하지 않았을까. 결국 흙이 된 예술가와 달리, 그의 조각상은 여전히 턱을 괴고 눈을 내리깔며 생각한다. 끝나지 않는 그의 생각 역시 하나의 오발탄이다. 인간이라는 과녁을 향해 그는 하염없이 생각을 발사한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분노와 사랑 등 무수한 과녁을 지나치며 탄알은 여전히 비행한다. 청동 주조물 안에 갇힌 탄알은 끝내 과녁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녁이 아닐지도 모른다. 끝없이 비행하며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하는 자그마한 것들. 그들의 존재와 운동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자 세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탄알들이 향한다. 삶은 오발된 탄알들의 비행이고, 어쩌면 그들이 도착할 과녁이란 죽음이라는 안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과녁이 아닌 과녁을 향하는 그들을 기록하는 하나의 세계를 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