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연출한 <버드맨>(2014)의 결말은 인상적이다. 한물간 히어로물 스타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연출한 극을 브로드웨이에 올려 재기를 꿈꾸지만, 과정은 쉽지 않다. 배우들은 제멋대로 굴고, 평론가는 극이 상연되기 전에 악평을 예고한다. 시작된 극은 어떻게든 결말을 향해 가고, 마지막에 나타난 리건은 사전에 약속된 모형 권총이 아닌, 실탄이 장전된 자동권총으로 자신의 코를 날려버린다. 극이 끝나고, 병원에서 깨어난 리건은 딸인 샘(엠마 톰슨)이 잠시 나갔다 온 사이 사라져 있다. 창문은 열려있고, 샘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상영 당시, 결말을 두고 여러 해석들이 오갔다. 작중 초능력을 구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리건은 끝내 과거 연기했던 ‘버드맨’이 되어 비상하는 결말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결국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 실패한 예술가의 자살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일부러 감독이 열린 결말을 의도했다는 평도 있었다. 영화 자체가 서사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은 아니다 보니, 그런 의견도 충분히 있을만했다.
히어로물에서 영웅의 능력으로 자주 활용되는 것은 비행 능력이다. 날개를 가지고 있거나, 날개가 없더라도 공중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인물에게서 우리는 영웅적 자질을 발견한다. 이는 아마, 중력이라는 거대한 법칙의 영향 아래 놓인 인간의 태생적 운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비행에 대한 동경은 어린아이일수록 강력한 욕망을 품게끔 한다. 아이들은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고 싶어 한다. 두 팔을 길게 뻗고 힘차게 점프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몸이 공중에 떠다니며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찰나의 순간, 현재에 대한 몰입과 쾌락이 온몸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앙리 마티스의 작품집 <재즈>에 수록된 작품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 속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이야기를 차용한다. 신화에서 다이달로스는 테세우스를 미로에서 탈출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히게 된다. 실타래 없이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새의 깃털과 밀랍을 이용해 날개를 만들어 아들과 함께 미궁을 탈출하게 된다. 그러나, 태양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비상을 거듭하던 이카루스는 태양열에 의해 밀랍이 녹아 결국 추락하게 된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비극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신화는, 마티스의 컷오프 기법에 의해 단순하고 직관적인 작품으로 표현된다. 작품 속 인물은 허우적대는 듯한 자세로 비행하고 있다. 온몸이 검은색으로 뒤덮인 그의 신체에서 유일하게 채도가 존재하는 부분은 심장 언저리의 붉은 점이다. 신화 속 이카루스는 끝내 추락사한다. 그러나, 마티스는 작품에서 이카루스가 삶을 구가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작품 속 붉은 점은, 이카루스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가 비행 중이든, 추락 중이든 간에.
마티스가 말년에 이르러 컷오프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당시, 밖은 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카루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공군 비행사를 의미한다고 한다. 추락의 죽음에서 비상의 욕망을 동시에 엿본 그의 작품은, 그가 말년에 병색이 짙어지며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자유에 대한 갈망인 동시에 예정된 죽음을 은유한다. 비행의 끝에는 추락이 있다. 비행은 추락으로 완성되며, 삶은 죽음에 이르는 무수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싱가포르 태생의 작가인 호추니엔의 전시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내 작품 <호텔 아포리아>(2019)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상이 송출된 거대한 스크린들로 구성된다. 스크린 속 병사들은 일본 제국에서 징집된 학생들로, 이들은 카미카제 작전에 투입되어 전투기에 몸을 싣게 된다. 비행하기 전, 한데 모여 제국에 대한 투철한 애국심과 전쟁의 승리를 연호하는 이들의 대화 전반에는 예정된 죽음의 공기가 짙게 배어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애국심과 열망을 드러내는 언어와 필멸의 역사가 지니는 부조리 사이의 간극에서, 작가는 이들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전란 속 망령들의 비워진 얼굴 속에서, 관객은 예정된 죽음을 위해 삶에서 비상하는 이들의 내면을 채워 넣는다. 불안과 두려움, 혼란과 더불어 제국의 승리에 대한 욕망이 뒤섞인 존재들 뒤에서 작가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과연, 저들의 비행은 비상인가, 추락인가. 아니, 어쩌면 비상과 추락은 애초에 대립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닐까. 마티스가 색종이를 오려내 이카루스를 형상화하듯, 호추니엔은 병사들의 얼굴을 지워내 그들을 특공대로 만들어낸다. 마티스의 붉은 점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호추니엔의 하얀 공백은 병사들의 감정을 지워낸다. 그들의 손끝에서, 비상과 추락은 더는 구분되지 않는다. 날개는 죽음을 향한 비행이자, 추락에 대한 의지다.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자리한다. 예정된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삶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지상을 향한 느린 추락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비행은 단순히 죽음에 다다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순간의 욕망을 위해 기꺼이 점프하듯, 비행은 찰나를 삶으로써 온전히 감각하는 선언이자 의식이다. 비행과 추락이 동일한 과정이라면, 지상을 벗어난 허공에는 자유의 쾌락과 죽음의 두려움이 뒤섞인 채 부유한다. 그렇다면, 발 디딘 땅의 안정감을 기꺼이 벗어던지고자 하는 이들의 날개는 과연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 걸까. 예술가는 그 답을 인간의 내부에서 찾는다. 마티스는 심장 언저리에 붉은 점을 새겨 넣었다. 원형의 점은 단순한 종이를 이카루스로 만들었다. 그는 비상하는 동시에 추락하는 중이다. 중요한 점은, 그는 작품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카루스는 미로 너머를 비행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영원히 허공을 떠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 충동적인 쾌락과 내밀한 욕망, 두려움과 더불어 그 모든 불완전함이 있다. 날개는 인간의 불완전성이자 완전한 자유에 대한 꿈이다.
<버드맨>에서, 딸인 샘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곧이어 허공을 응시하며 미소를 짓는다. 버드맨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그는 비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비상 중이자, 동시에 추락하는 중이다. 그리고, 다이달로스의 미로와 같은 병원 입원실에서 기꺼이 창밖으로 몸을 던져내고자 그를 추동한 힘은 그의 내면 속에 타오르게 된 붉은 점이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권태 속에서 무력하던 그는 비로소 지난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유를 염원하며 파괴적 충동을 갖게 된 그의 날개는 마침내 허공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펼치게 되었고, 사각 프레임을 넘어 삶과 죽음 속으로 뛰어든 그에게서 나는 아이 같은 해맑음과 부조리한 삶에 대한 염증을 동시에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