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이 예정된 날은 내내 가을비가 내렸다. 다행히 모든 활동이 실내에서 진행되었기에, 기상 상황은 계획된 일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2012년 여수 엑스포 행사 당시 기업에서 건립한 아쿠아리움은, 10년이 넘도록 지역의 랜드마크로 기능하며 당시의 기억을 상징화하는 중이다. 1층에 구성된 헬가 스텐실의 전시회를 관람한 후,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은 해양 생물들을 관람했고, 나는 알림장에 올릴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내내 분주했다.
일정이 끝나고 퇴근한 후, 집에 와 알림장 앱에 올릴 사진을 선별했다. 적당한 사진을 추려내던 중, 포토존에서 학급 아이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에 눈길이 갔다. 사진 속에서 한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마, 촬영 직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맞닥뜨렸을 것이다. 잔뜩 기분이 상한 듯 부루퉁한 아이의 표정은, 해맑게 웃고 있는 15명의 아이들과 함께 렌즈를 통과하여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되었다. 촬영 이후 집합할 때, 아이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았다. 그러나, 사진 속 아이는 그럴 수 없었다. 순간을 포획한 빛의 체계 속에 편입된 감정은 뒤바뀔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사물은 녹슬고 무질서해지며, 이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변용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와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신과 의학 기술은 결국 영생과 불변하는 삶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영원에 대한 욕망은 다양한 갈래로 뻗쳐나갔다. 고대와 중세에 화가는 인물의 초상화를 그렸다. 늙지 않는 왕족의 초상은 붓끝에서 탄생해 영원히 종이 속에 머물렀다. 사진 기술이 발명되자, 박제와 복제는 한층 용이해졌다.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고 풍경과 인물을 찍었다. 인화된 필름 속에 세상의 시간은 정지 상태였다. 인간의 욕망은 영원의 세계를 끝내 창조해냈다.
사진의 욕망은 시선의 욕망과 맞닿는다. 수전 손택은, 사진이 재현해놓은 현실을 그 사진에 충실해지기 위해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된 현실이라 말한다.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사진과 시선 안에는 주관적 기준에 따라 재구성된 현실이 박제된다. 시시각각 변해가며 알 수 없는 세상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시선과 사진을 매개로 세상에 투사된다. 포획된 순간의 편린은, 그렇게 세상에 대한 이해의 증거로 기능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한 <마스터>(2012)에서, 주인공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전역 후 사진사로 일한다. 부조리한 삶에 내던져진 그가 코브라는 신흥 종교와 교주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먼)를 만나기 전까지, 사진은 그가 알 수 없는 삶을 이해하고 포착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의 카메라는 결국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삶은 여전히 렌즈 밖에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기질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심리학부터,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경험적 산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논거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모든 건 변한다고 생각한다. 고정된 본질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욕망에 의해 투사되고 복제된 세계다. 사진 속 환하게 웃거나 슬피 우는 이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미련과 향수가 사진과 기억으로 삶을 이끈다. 그러나, 렌즈 속으로 우리는 끝내 가닿을 수 없다. 세상은 렌즈 밖에 존재한다. 기억과 인식에 매달리는 삶의 부조리는, 카메라와 멀어지는 순간 처참히 깨져버린다. 현실은 낯설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지난하다.
한동안 휴대폰 속에 저장된 사진들을 들여다보곤 했던 시기가 있었다. 여행지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 대학생 시절과 동기들을 비롯하여 동아리원들과 찍은 사진들, 동아리 공연 영상과 발령 후 학교에서의 사진들. 과거의 모든 내가 지금의 나라 굳게 믿던 시절은 어느 순간 너무나 먼 과거가 되어버렸고, 가끔 들춰보는 사진은 언젠가부터 낯설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과연 어디로 떠난 걸까. 변화의 긍정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아에 대한 상실감이 공허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사진이 예술이 되는 이유는, 어쩌면 그러한 공허를 채움으로써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 속 아이는 여전히 찡그린 표정이고, 나는 고민한 끝에 결국 이 사진을 남겨두었다. 다음 주가 되면 아이는 웃으며 학교에 올 것이다. 그러면, 사진 속에 머물러 있던 세계는 비로소 무너질 것이다. 사진이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된 현실이라면, 사진 속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렌즈 밖의 일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삶을 구가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바탕 폭우가 내린 뒤 잦아든 빗줄기. 다음 주면 날이 풀린다고 한다. 슬슬 가을 옷을 꺼낼 때가 된 것 같다. 여전히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