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처럼 여기저기 잘 굴러다니는, 물처럼 흐르는
블로그에 대뜸 인터뷰를 하겠다며 글을 올리고는 줄곧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막막했다. 나는 무언가 홀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힘이 든다. 그래도 이번 작업은 생각이 날 때마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쌓아두고 싶었기에 마음을 바꿔 먹기로 했다. 내가 올린 글 속 나의 문장처럼 세상은 홀로 살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조금은 무책임해지기로 했다.
인터뷰는 질문자보다 답변자가 주인공인 법이니까, 적어도 나의 인터뷰에선 그런 모양새이길 바란다는 명목 하에 답변자에게 절반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좀 우스운 말이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인터뷰란 답변자가 반 이상의 것을 갖고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저 답변자에게 애정 어린 질문 몇 개만 준비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다 오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 먹으니 한결 편했다. 그리고 나선 몇몇 친구들에게 훗날 나의 인터뷰에 응해달라고 부탁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월간 시간표만 보아도 인터뷰만을 위한 시간을 맞추는 건 버겁기에 그때그때 만나게 될 친구들 먼저 연락을 돌렸다. 여러 번 약속들을 맞추고 미루다가 마침내 첫 답변자가 될 친구가 생겼다.
내 친구 정, 사실 나는 이 친구에게 호칭 없이 이름 두 글자로만 부르거나 말을 놓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우린 친구다. 서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다 만나게 된 우리는 이제 그 대상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지 않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은 점점 커다랗게 거대해져 가는 걸 느낀다.
정을 보면 자연히 클로버가 생각이 난다. 잎의 수는 그날의 마음 따라 달라져도 내게 정은 클로버다.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정이지만, 왜인지 연두의 냄새가 난다.
정은 내게 선물을 자주 쥐어준다. 그 많은 선물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벅차고 감사하다. 이번 인터뷰도 나에겐 너무 선물이다. 감사한 마음에 정을 위한 질문들을 정성스레 준비했지만 그 시간들이 무용하게 내 질문들은 너무 작았다.
정말 부끄러운 첫 인터뷰 작업이다. 그렇지만 정과의 대화는 내게 너무 소중했기에 얼른 받아 적어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자림 정
*모든 질문엔 시선의 검열을 거친 답보다는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을 위주로 답해주세요.
- 아까 우리끼리 밴드 이야기를 길게 했잖아요. 그럼 요즘 정님이 관심 가는 쪽, 분야가 밴드 문화인가요?
- 네, 그렇죠.
- 밴드를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 음, 일단 지난 7월, 부산 공연장에서 에너지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함께 나누던 사랑이랑… 에너지들이 기억나요.
- 어떤 부분에서 에너지를 받으셨나요? 좀 더 세세한 부분 말이에요.
- 공연을 하는데 밴드가 신나 있어, 그럼 팬들도 신나서 떼창을 하는데, 그럼 또 밴드 분들이 더 신나. 밴드 분들이 신나면 팬들은 더더 신나! 그런 모습이 좋았어요. 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좋아요. 그날 공연에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정말 많이 받고 올 수 있었어요.
- 음, 같은 공간에서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는…!
- 네, 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아하는 걸 같이 하는…
- 지금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날 공연이 정말 정님께 좋은 기억으로 남으신 것 같은데 그 기억을 추억하시는 방법이 따로 있으신가요?
- 추억? … 아무래도 공연이 끝나면 공연을 보고 좋았다는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되새김질하는 것 같아요. 제가 찍은 영상도 다시 보고 SNS로 되새김질하는 주먹 울음의 시간이 1차적으로 필요한 되새김의 시간이고요. 이 짤처럼요.
2차적으로는 노래를 들을 때, ‘한번 더! 하나, 둘, 셋, 뛰어!’ 같은 공연의 움직임들이 저절로 생각나는, 저는 음원을 듣고 있을 뿐인데도 공연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 있고요. 3차 추억은 이제 SNS에 다시 올라오는 게시물들을 보며 다시 떠올리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제 SNS 게시물을 보고 공연에 대해 물을 때 다시 또 그때의 에너지를 이야기하면서 계속 되새김질하고… 마치 소처럼…
- 반추하는… (웃음) 지금 생각나는 밴드 음악 하나 정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 나상현씨밴드의 ‘FILM’입니다. 공연의 오프닝 곡이었는데 첫 밴드 공연 관람이라 설렘과 긴장, 약간의 걱정을 안고 있었어요. 도입부를 오래 연주하다가 ‘반가워요’라는 인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는데 음원을 들을 때도 도입부에서 그때 느꼈던 설렘과 긴장이 생각나서 가장 그때의 모습이 잘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근데 너무 나씨밴 얘기만 하나요?
- 괜찮아요. (웃음) 정님이 나상현씨밴드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까 우리 둘이서 이야기할 때 들었으니까, 정님이 이 밴드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뭐예요? 개인적인 이유가 듣고 싶어요.
- 일단 저는 노래를 듣는 걸 정말 좋아했고 좋아하고 좋아할 건데요. 특히 밴드 음악이요. 저는 밝은 노래들을 좋아하고 자주 듣거든요. 근데 나상현씨밴드 노래는 대부분 밝은 노래들이에요. 가사 주제도 밝고 연대, 우리, 사랑 같은 키워드를 주로 사용해서 밝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제 취향이 잘 부합한 것 같아요.
- 지금 우리가 나상현씨밴드 이야기를 오래 해서 나상현 씨 귀가 아주 간지러울 것 같은데… (웃음) 정님이 생각하시는 나상현씨밴드의 연대는 어떤 느낌인가요?
- 제가 나상현씨밴드를 잘 몰랐을 때 ‘1+1’이라는 노래를 들었거든요. 그 노래 가사 중에 ‘우린 여기 서있고 지울 수 없을 거야’라는 가사가 있어요. 그 지울 수 없다는 말이 모든 소수자들에 대한 메시지라고 느꼈고 실제로 나상현 씨가 그런 의도의 구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어요. 이 가사를 포함해서 다른 다수의 곡들 속 ‘우리’라는 키워드로 진행되는 가사를 읽으면 벅차오르기도 하고 희망적인 느낌입니다.
- 노래를 들으면서 공감을 많이 얻으셨나 봐요.
- 네, 그런 것 같아요.
- 정님께 연대는 중요한 의미인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을까요?
- 전 연대가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꼭 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만이 연대가 아니라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같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작은 소통, 이런 것들이 모두 연대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소통이라는 개념이 정님의 연대에서는 되게 중요한가 봐요. 그럼 평소에 주변 사람들과의 많거나 깊은 소통을 지향하는 편이신가요?
- 전 혼자 생각을 한 후에 저만의 검열을 거치고 입 밖으로 내보내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일단 첫 번째로 제 자신과의 소통,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타인과의 소통 또한 중요하죠. 소통 없인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잖아요. 나 말고 남의 생각도 잘 듣고 서로 이야기 나누고,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자신과의 소통이 우선이고 타인과의 소통이 다음 순서라는 말씀이시죠?
- 맞아요. 가끔은 나와의 소통도 잘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자신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 그럼, 가장 정님다운 시간이나 공간은 언제,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 제일 저 다운 공간은 제 방입니다. 제 책상 앞, 거기서 제가 하는 많은 일들이 이뤄지고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저 다운 시간은 새벽 한두 시인 것 같아요. 그 시간이면 가족들이 다 잠들거든요. 집이 조용하면 저는 제 방 의자에 앉아서 달을 보기도 하고 그냥 폰을 하거나 일기를 쓰기도 하고 영상을 보기도 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 제가 좋아하는 걸 하는 그 고요한 저녁 시간을 제일…
- 아끼시나요?
- 네, 아끼고 생각을 많이 하기도 하고… 그 시간이 아까워서 잠을 늦게 자요. 그 시간들을 좋아하죠.
- 혼자만의 시간은 누구나 필요하잖아요. 근데 그 시간을 가장 아끼는 시간으로 여기시는 것 보면 우선순위 중 높은 순위에 있는 것 같은데, 더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 때가 있었나요?
-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서 생활했었는데, 2인 1실이다 보니 항상 누군가가 있거나 들어올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학교를 다녀와서 쉬어야 하는 저녁 시간인데도 누군가와 있다, 그게 스트레스였어요. 이때가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 같습니다.
-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이 있다’, ‘함께 있다’ 고 느끼지 않잖아요. 그럼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않아도 함께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때는 언제인가요?
- 연락할 때? SNS나 톡으로 얘기를 하고 같은 걸 보면서 웃기도 하고 반응도 하잖아요. 그때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 함께하는 삶을 곧 소통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함께한다는 개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 혼자 있는 나도 중요하지만 소통하는 나도, 함께하는 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지향점이 같거나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걸 나누는 게 즐거운 일이잖아요. 거기에서 많은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웃고, 재밌잖아요. 좋아요.
- 지금까지는 함께해서 좋은 점들을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반대로 불편한 점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 친구들을 만날 때는 공통점이 있거나 서로 아는 사이라서 함께하면 좋은 건데, 학교 같은 사회에서는 너무 맞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 전혀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과도 같이 살아야 하잖아요. 그럴 때 느끼는 스트레스들, 좋지 않은 순간들이에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죠.
- 그 불편함 들은 극복하기 어려울까요?
-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보단,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있는 순간도 있으니까 이외의 사람들과의 시간도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있어야 하고 많은 것을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 불편함에서 배움을 얻는다는 태도가 멋져 보여요. 혹시 지금 살아가면서 갖고 계신 고민이 있을까요?
- 항상 하는 고민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 방법을 찾아가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 같다고 느껴요. 저는 제 감정에 잘 동요되는 편이기 때문에 순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감정을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또 다른 고민은 직업적인, 현실적인 일들이랑 제가 좋아하고 에너지를 얻는 것들 두 가지 모두 잘하고 싶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 들어보니까 전체적으로 소정님이 갖고 계신 고민들의 키워드가 균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오, 맞아요.
- 균형을 맞추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요?
- 전 만약에 제가 균형을 못 잡을 일이 생기면, 객관적으로 생각해 본다던지, 저는 항상 곰곰이 생각을 많이 해요. 아니면 막 적어본다던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편이에요.
- 정님이 생각하는 정님의 삶의 이미지는 어떤가요?
- 약간 물 같아요. 요리조리 흘러가고 잘 변하는, 뜨거워졌다가도 차가워지는 그런 느낌이에요.
- 정님의 이상적인 삶의 모양이 있나요?
- 저는 동그라미를 좋아해요. 동글동글.
- 이것도 앞서 말씀하신 균형이랑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 그러네요? 제가 성격이 둥글둥글하기도 하고 동그라미처럼 여기저기 잘 굴러다니는, 물처럼 흐르는, 다 연결이 되네요. (웃음)
- 그러게요. 그럼 살아가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몇몇만 꼽아주세요.
- 우선 저는 저를 소중하게 여기고요. 그리고 가족, 친구들, 글자 적기, 영화, 음악, 이렇게 다섯 개?
- 그 소중한 것들을 각각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계시나요? 정님이 소중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이 궁금해요.
- 쉬운 것부터 말하자면, 음악과 영화는 늘 사랑하고 있고요. 관련해서 제 지식을 넓혀가기 위해 열심히 듣고 보는 중입니다. 글자 적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기 쓰기나 필기 등을 자주 하고 있고 요새는 짧은 글을 적어보고 싶어서 시도하는 중입니다. 가족들은 사랑하고요. 친구들이랑은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해요. 인연을 이어간다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해가 되지 않는 친구가 될 수 있게, 왜냐하면 그들은 저에게 너무 좋은 사람들이니까 저도 꼭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많이 하려고 해요.
- 소중한 사람들의 어려운 걸 도와주고 하고 싶은 걸 도와주는 느낌이네요. 정님에게 도움은 어떤 의미예요?
- 받고 싶기 때문에 저도 열심히 주는 그런 느낌이에요.
-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신 편인가요?
- 그런 것 같아요.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겐 도움을 주고 싶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저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 정님에게 무언가를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 어떤가요?
-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제 여건이 되는 한에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받는 마음은 감사하죠, 좋죠. 많이 받고 싶어요.
- 많이 받고 싶으시니까 많이 주시고, 좋은 사람이니까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신가 봐요. 주고받는 것, 서로 오가는 것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 네, 그쵸. 그렇네요.
- 정님이 살아가는 중에 사랑의 중요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 사랑은 필요한 것 아닐까요? 사랑 없인 못 살아… 사랑 때문에 살아…
- 정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에 필요한 요소들은 무엇인가요?
- 음, 신뢰? 네, 신뢰와 애정이요.
- 신뢰와 애정 또한 서로 주고받는 형태를 지향하시는 건가요?
- 그렇죠. 제가 믿으니까 믿음을 얻고 싶고…
- 정님에게 사랑은 신뢰와 애정이 오가는 관계이고 그런 관계가 정님의 사랑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어요. 그럼 사랑과 대치되는 개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증오인 것 같아요.
- 정님께 증오는 어떤 느낌이에요?
- 별로… 안 하고 싶은 거? 증오를 하면 서로 힘드니까 딱히 한다고 해서 득이 될 건 없지만, 사랑은 대체로 득이 되잖아요. 증오는 증오가 향하는 대상이나 하는 대상 모두 득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해요.
- 애증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과 증오가 하나로 묶인 단어잖아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애증… 그렇네요. 애증… 사랑과 증오… 사랑을 발효시킨 버전이 아닐까요?
- 사랑을 발효시킨 버전이요?
- 사랑하다 못해 증오하는…
- 음, 그럼 애증의 감정을 느끼거나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타인이 가진 애증을 보았던 경우도 포함해서요.
- 아직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오래된 부부 사이 감정 같은 거 아닐까요? 아직 겪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사랑해서 시작된 관계지만 서로 가장 미워하고 어쩌면 신뢰를 기반으로 사랑해 왔기 때문에 증오도 하게 된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랑의 발효된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면 너무 증오해서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 구교환 씨의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린다’는 말처럼요?
- 어!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의 발효된 버전도 증오의 발효된 버전도 애증…
- 그럼 사랑이랑 증오는 깊어지면 애증이라는 감정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건가요? 한 가지 감정이 너무 깊어지면 서로 대치되는 개념까지 갖게 되는 그런 느낌일까요?
- 이렇게 (원을 그리며) 돌게 되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사랑하거나 증오하면 가다가 멈추겠지만 멈추지 못해 가다 보면 서로 만나버리는…
- 사랑이랑 증오는 대치되는 개념이지만 평행한 개념은 아닌가 봐요.
- 사랑이나 증오나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사랑할 때 체력이나 정신력이 필요한 것처럼 증오도 그렇기 때문인 것 같아요.
- 증오에서 벗어난 질문을 해볼게요.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사랑의 모양 중에 정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의 표본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있나요?
- 가장 가까운 거라면, 잠 못 드는 거? 저녁 시간에 잠 못 들고 계속 생각나는 거, 이불킥이라던지 이런 거요. 내 공간에서 그 사람 없이 편하게 있는데도 불편한 그 감정이 사랑 같아요. 계속 생각나고, 사랑을 하면 무언갈 계속하고 싶잖아요. 계속 보고 싶고 혼자 편하게 있는데도 편하지 못한 그런 상황이요.
- 사랑에 관련된 노래나 드라마 이미지들에 거의 매번 나오는 장면이네요.
- 맞아요. 그래서 바로 생각이 났어요. 혼자 집에서까지 하게 되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 정님이 미디어 속에서든 주변에서든 닮아가고 싶은 이상향, 이상형이 있을까요?
- 친구가 한 명 있어요. 그 친구와는 서로를 되게 아껴주고 좋아하고 귀여워하는 사이인데, 그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미래 계획도 세우면서 주변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너무 사랑하고 그 표현을 아끼지 않는 친구예요. 원하는 방향을 열심히 추구하고 주변도 잘 챙기고 똑똑하고 멋있는, 사랑 넘치는, 그런 친구입니다.
- 친구 분의 좋아하는 걸 사랑하고 사랑하는 걸 좋아하는 모습을 닮아가고 싶으신 것 같아요.
- 맞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려고 모든 부분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닮고 싶어요. 사랑도 열심히, 공부도 열심히. 친구 중에서는 그 친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고요. 두 번째로는 어머니요. 어머니랑은 닮은 듯하면서도 거의 반대거든요. 저는 혼자 있고 충분히 계획하고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데 어머니는 정말 활동적이고 즉흥적인 분이에요. 제가 엄마 덕분에 라식을 예약하고 검사하고 수술하는 데까지 여섯 시간도 안 걸렸어요. 그 충동적인 추진력! 저도 추진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생각하고 계획하고 마음먹으면 밀어붙이는 편이고 시작을 해도 많이 흐지부지되는 편인데 어머니는 한번 시작하면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 끝까지 하시는 편이에요. 그런 점들이 저에게 부족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그런 점을 닮아가고 싶어요.
- 아까 다른 점에서 배움을 얻으신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요.
- 네, 맞아요. 주변에 자기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서 귀감을 얻는 것 같아요. 저도 열심히 살고 싶어서요.
- 그냥 살아갈 수도 있는데 열심히 살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 그러게요. 음, 이왕 살아가는 김에 많은 걸 하고 이것저것 배우면서, 열심히 살아야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잖아요. 많은 걸 경험하고 싶기도, 이뤄내고 싶기도 해요. 계속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기 안에 갇히면 정말 별로일 것 같아요. 항상 배우고 열심히 사는,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이뤄내고 싶은 형태나 지향점이 있나요?
- 우선 지금은 학생이기 때문에 직업을 가지는 것이 첫 번째 지향점이고요. 두 번째는 안정적인 삶을 만드는 것, 경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삶의 리듬의 안정이나 모든 면에서요.
- 직업을 가지려는 지향점도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인 것 같아요.
- 네. 저는 안정적일 때, 규칙적으로, 계획대로 흘러갈 때 편안함을 느껴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것 같아요.
- 살면서 많이 찾게 되거나 찾는 예술 작품이 있나요? 크게 귀감이 된 작품과 자주 찾는 건 조금 다르잖아요.
- 자주 찾게 되는 건… 유튜브에 드뷔시랑 라벨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요. 저는 평소 드뷔시랑 라벨의 음악을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는데 그 음악들이 고흐의 그림이랑 같이 엮여있는 플레이리스트예요. 집중이 필요할 때나 편안해지고 싶을 때 많이 찾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예술 작품? 음… 모네의 생아르스의 정원, 너무 좋아해서 피포페인팅을 사서 칠하기도 했어요. 영화는, 마틸다! 1996년 작품과 2022년 뮤지컬 버전이요.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소설이기도 하고 어리지만 영리하고 당찬 마틸다가 가끔 보고 싶어 져서 자주 보는 편입니다. 이상입니다.
-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싶을 땐 희망이 꼭 필요하잖아요. 희망을 유지하는데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절망에서 나올 수 있는 루틴이나 습관 같은 게 있나요?
- 희망의 반대말을 절망이라고 한다면 절망적일 때 그 감정에 잠식되어 그 절망을 충분히 느끼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장 상황은 절망스러운데 인정하지 못하고 억지로 노력하는 게 더 힘들잖아요.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지금 이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막연하게 벗어나려고 애쓰기보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충분히 느끼는 게, 그 상황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게 꼭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다 보면 다시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 저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제 태도를 말씀드리자면 지금 그 일들에 대한 관심만 가득하지, 전문성이나 실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과정에서 멈춰버리거나 흥미를 잃곤 하는데 조금씩 열심히 이것저것 많이 해서 나중에 꼭 저만의 것들을 남기고 싶어요!
- 정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정말 동그라미 원 그 자체이신 것 같아요.
- 그런가요? (웃음)
- 정님의 이야기는 다 이어져있고 그 원 안에서 탱탱볼처럼 움직이는 느낌이에요. 어딘가에 치우쳐있기 보다요.
- 그런 안정적인 상태가 이상향이에요. 그리고 더 말랑말랑한 동그라미였으면 좋겠어요. 어디에든 낄 수 있게, 유연한 사람이고 싶어요.
- 슬라임처럼요?
- 어! 맞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 점도 있는 물처럼요?
- 네, 맞아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하니까 제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더 잘 알아가야겠다 생각했었는데…
- 생각보다 더 잘 알고 계시죠?
- 네, 생각보다 더 잘 알고 있기도 했고,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느끼면서 내가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도 알게 됐고, 절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았습니다.
- 서툰 저의 진행을 기다려주시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해요.
- 서툴러서 좋았어요. 유재석 씨면 재미없죠.
- 그게 맛이에요? 좋아요. 그래도 나중엔 유재석 씨가 되어서 다시 올게요.
- 좋아요. 수고하셨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추신. 정은 멋진 사람이다. 덕분에 이 작업의 의의를 또다시 깨달았다. 나는 내 주변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