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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 속 건축가 Dec 26. 2024

서양건축사 강의를 두 시간 만에 끝냈더니

역사에 대한 생각

대학원 학생이던 시절 갑자기 건축사(史) 강의를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옆 연구실의 선배가 어느 날 나에게 부탁을 해온 것이다.

자신이 한 인테리어 학원에서 의장기사 수험반 강사를 하고 있는데, 급한 사정이 생겨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나보고 이어서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어떤 종류의 강의도 해 본 적이 없었고 용돈도 넉넉했기에 거절했지만, 그 선배와의 돈독한(?) 친분 때문에 결국 그 일을 맡게 됐다.


부랴부랴 수업 준비를 해보니 첫 수업이 건축사 과목이었고 남은 날짜는 겨우 사흘뿐이었다.

시험 범위는 메소포타미아 건축에서 미니멀리즘까지.

햇수로 따지면 족히 5천 년 정도의 범위다. 수업 시간은  1회 두 시간.


난감했다.

나는 건축사가 전공도 아니었고 심지어 학부시절에도 서양건축사를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다.

3학년 때 한 학기 서양건축사를 배웠는데 그때 썼던 교재가  '서양건축사 정론'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국내에서 출간된 건축 관련 책 중에서 그보다 두꺼운 책을 보지 못했다. 타블로이드(B4) 크기에 두께는 내 베개만큼 두꺼웠다.(모두들 그 용도로 썼다)


그 책을 가르치던 교수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는 생략하고 에게문명부터 시작했지만, 학기말이 되니 겨우 로마 입구에 도착한 것으로 내 유일한 서양건축사 수업은 끝나버렸었다.

교수의 전공이 그리스/로마건축이어서 그랬는지 교재에 수록된 그 수많은 사진도 모자라서 본인이 직접 찍은 그리스 건축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느라 수업은 늘 환등기를 켜고 진행됐다.

좋은 침구와 조용한 배경음에 아늑한 조명까지 제공되는 수업이었다.


다행히 근대건축사에는 관심이 많아서 적지 않은 책을 읽었었기에 남에게 설명도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 대해서는 고딕건축이 먼저인지 로마네스크가 먼저인지도 헛갈리는 수준이었다.


급하게 건축사 책을 몇 권 읽으면서 수업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학원의 수강생들의 대부분은 나와 나이가 비슷한 성인들이고 건축을 전공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들었다.

건축사가 포함된 과목에서 건축사에 관한 문제는 겨우 두세 문제 정도였고 어느 시대에서 문제가 출제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의장기사 제도가 도입된 초기라 기출문제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다)


결국 두께가 얇은 건축사 책을 소개해주고 시험 때까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재미 삼아 읽어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수업시간에는 전체 건축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그 시대별 명칭과 순서 그리고 대표적인 건축물 몇 개만 소개해 주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런 수업을 2년 동안 수차례 진행했다. (학원은 한 학기가 3개월이었다)


그런데 나는 대학원 시절 그 겉절이 김치  같은 건축사 강의를 몇 차례 한 덕분에 큰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한 학기에 두 시간 짬을 내어 내 학생들에게 서양건축 통사를 가르치고 있다.

(* 내 수업은 건축사 수업이 아니라 설계 수업이고, 요즘 건축공학부에서는 건축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두 시간 만에 그리스/로마건축에서 당시에 최신 트렌드라고 할 수 있었던 미니멀리즘까지 극심한 속강을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 점점 건축사의 통사적인 흐름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건축사를 내가 이해한 것처럼 설명하는 건축사 책은, 적어도 번역되어 소개된 것 중에서는 보지 못했다.


간단한 그림이라도 예를 들면서 설명해야 이해가 되는 내용이어서 별도로 꼭지를 만들어 전달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얼개만 적어 놓기로 하자. 이것만 외워도 유럽여행할 때 큰 도움이 된다.


1.

건축의 양식은 그 시대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서 변증적으로 반발하며 전개되어 왔다.

그 한쪽(thesis)은 늘 '인간'이었고 반복해서 매치에 등장한다.

다른 한쪽(antithesis)은 '신' '왕' '귀족' '부자'가 태그매치로 교대해서 등장한다. (모더니즘 이후에는 이 네 명의 선수가 가면을 쓰고 링 위에 오른다. 그리고 교체 주기가 점점 빨라진다.)


즉. 그리스/로마(인간), 로마네스크(교대 시간), 고딕(신), 르네상스(인간), 매너리즘(교대시간), 바로크(왕), 로코코(귀족), 아르누보(교대시간), 모더니즘(인간), 포스트모더니즘(부자), 해체주의(교대시간), 미니멀리즘(인간?)이다.


물론 극심하게 압축시킨 건축사이다.

비잔틴과 사라센도 빠졌고 빅토리아 양식과 신고전주의 같은 소소한 것들도 빠졌다. 하지만 우리가 비싼 돈 들여서 가는 유럽의 도시와 건축물들은 모두 저 중 하나에 포함된다.(티르키에 와 러시아 제외)

그것들의 장르만 구분할 수 있어도, 누구의 말처럼 그때 보이는 것은 다를 것이고 여행이 훨씬 즐거워질 것이 분명하다.


2.

건축의 양식은 이런 특징으로 교차된다.


1) '인간'의 시대에는 단순하고 다른 시대에는 복잡(화려)해 진다. 당연히 돈도 많이 든다.

2) '인간'의 시대에는 수평선이 강조되고 다른 시대에는 수직선이 강조된다.

3) '인간'의 시대에는 건물의 머리에 관을 씌우지 않고 다른 시대에는 왕관뿐 아니라 신발도 화려해진다.(전문 용어로 Base, Shaft, Head의 세 요소를 뚜렷하게 하려고 든다)

4) '인간'의 시대에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좋아하고 다른 시대에는 자꾸 무엇인가를 상징하려고 한다.(과거 시대의 양식을 재현하려고 하는 것도 포함. 이를 고전주의,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인간'의 시대에는 검소하게 짓고 '비인간'의 시대에는 돈을 많이 들인다. 그리고 그 돈이 자기 돈이 아닐 때가 많다.


물론 내가 설명하는 건축사의 변증적 전개와, 극도로 단순화시킨 양식적 흐름을 반박하는 논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어쩌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간 각 시대의 양상은 그리 가볍게만 얘기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막스 베버나 하이데거의 얘기부터 들어봐야 하고, 매너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연관성을 통해 건축사 전개 원리를 설명하는 로버트 벤츄리의 '복합성과 대립성' 이론은 건축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그런 것에 대해서도 장차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라면 젊은 시절 반드시 읽어 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이 글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나는 늘 청소년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은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통사적인 이해가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긴 역사를 관통하는 원리를 스스로 터득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어떤 건축 작품이나 트렌드를 꽤 정확하게 읽어낼 힘이 생기게 된 점이다. 또 나아가서는 향후 전개될  양상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있던 다른 분야들 가령 미술, 공예, 조경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학, 음악 등의 분야도 거의 유사한 흐름과 양상으로 흘러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 건방을 떨자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제품 디자인이나 패션디자인이 왜 유행하는지 그 이유도 알게 되고 다음에는 어떤 디자인이 유행할 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부터의 말을 학생들과 또 어떤 분야에 새로 관심이 생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관심이 생기든지 그 역사를 먼저 읽어라'


목공예를 배우려고 한다면, 심지어 단순히 목공기술을 배우려고 해도 한 번쯤은 공예사를 읽어보는 게 크게 도움이 된다. 축구에 관심이 생기면 축구의 역사부터 한 번 읽어보고, 코딩을 배우고 싶으면 컴퓨터 언어의 변천사를 읽어보기를 권해주고 싶다. 

내가 이십대 시절 문학책 읽기를 열심히 한 것은 문학사를 읽은 이후부터였고, 철학사를 읽은 다음 그나마 철학책 몇 권이라도 읽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세상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경제의 흐름을 파악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면 속한 사회의 근현대사 한 권정도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역사를 읽으면 관심이 더 생기고 관심이 생기면 노력하는 일이 즐거워진다.


*사족

요즘 사람들에게 '아는' 건축가가 있냐고 물으면 가우디와 안도를 말한다. 심지어 건축공학과 3학년에게 '좋아하는' 건축가를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온다. 

둘 모두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은 아니다. 재미 삼아 앞에 말한 네 가지 관점으로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차라리 가까이 있는 정기용이나 차운기의 작품을 가서 보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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