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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 속 건축가 Dec 31. 2024

1987년 겨울

작은아버지께


서울의 혹독한 추위에 미국에만 계시던 작은아버지와 숙모님 그리고 어린 사촌들 고생하지는 않는지 걱정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 있었던 비행기 추락 사고에도 많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사고 자체도 너무 큰 슬픔인데 그 이면에 더 큰 슬픔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풍습이 겨울이면 항상 걱정하는 인사부터 하게 되는 것이 지난 시절의 가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상대적 부유를 누리는 사람들 덕에 서민들의 소득도 매력적인 숫자를 기록하게 되었지만, 후방 근무 덕분에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 보고선 그런 우스꽝스러운 숫자의 의미도 깨닫는 중입니다.

아직도 이 땅의 겨울은 많은 사람들을 추위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남쪽의 병영 생활에는 큰 영향이 없어서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내주신 귀한 책도 잘 받았습니다.

이곳의 사람들 상당수가 저와 같은 전공을 한 사람들이라서 모두 감사하게 돌려 보고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을 지닌 사람들과 지내던 곳을 떠나 이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제 협소한 눈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과 얘기 나누다 보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경제적 빈곤이 의식의 빈곤을 만들었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면 정치의 빈곤이 모든 것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점점 말이 적어지던 이곳의 사람들 모두가 이제는 무겁게 입을 닫고 삽니다.

병영 속에는 흐릿한 우울증이 돌림병처럼 창궐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태어나 처음 해보는 선거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침묵을 체험해야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젊다는 것이 곧 슬픔이기도 합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녕을 챙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는군요.

작은아버지의 바람을 이어가지 못하고 저는 얼마 전부터 교회에 가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부재는 저에게도 진부한 뉴스가 돼버려서 올 성탄절에는 신의 은총을 빌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성탄절은 기쁜 날이 될 거라고 모두들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가족 모두 처음으로 맞는 서울에서의 성탄절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에도 숙모님, 사촌들 모두에게 행운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87년 12월

K 올림.


아마 이 편지가 작은아버지께 도착했다면 군사우편으로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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