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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Mar 27. 2024

정신의 고양감

가지이 모토지로, 레몬


대구에 방문했을 때 구매한 책, 레몬 가지이 모토지로의 단편선이다. 일본 작가를 떠올리면 가장 좋아하는 건 요시모토 바나나와 히가시노 게이고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인데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좋았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가지이 모토지로가 24 세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32 세에 책을 내고 폐렴으로 별세했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중 오랜 시간을 병상에 있었다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글을 쓰게 했던 힘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 본다. 지금이야 폐렴이 금세 낫는 병이라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만 해도 폐렴은 작가들이 흔히 겪은  예술병이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을 맞닥트리면 이를 극복하여 이겨내기도 한다지만 동시에 초연함을 가지게 될 수도 있으리라.


그때 나는 굳이 "어디"라고 할 수가 없는 어둠에서 희미한 전율을 느꼈다. 그 어둠 속으로 역시나 절망적인 순서를 밟으며 사라져가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열정을 느꼈다. (중략) 나는 큰 불행을 느꼈다. 짙은 쪽빛으로 물든 이 계절의 하늘은, 그때의 나로서는 올려다보면 볼수록 그저 어둠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덩어리가 마음을 내리 짓누르고 있었다. 초조함이라 해야 할지 혐오감이라 해야 할지, 술을 마신 후 숙취가 오는 것처럼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 숙취에 상응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대개 나는 우울하고 회의주의적인 성향이 있어서 가벼워서 부서지고 날아가 버릴 듯한 것들에 대한 동경이 있는 듯하다. 스스로가 그렇지 못해서 그런것 같기도 하다. 대개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성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가 가지는 바스라질 것 같은 버석거림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더 약하고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하나하나 손끝으로 넘겨 보게 된다. 그 기분이나 느낌이 생경하고 좋다.


고양이들은 서로에게 안겨 있다. 유연하게 맞물려 있다. 앞발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지켜보는 사이에 나도 점점 고양이들의 움직임에 매료되었다. 그들이 맞물려 있는 괴상한 자세와 서로를 향해 뻗은 앞발. 그 발로 사람을 밀쳐낼 때의 귀여운 힘 등을 떠올렸다. 손가락이 한없이 파고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따뜻한 배의 솜털. 지금 한 녀석이 뒷발로 그 솜털을 밟고 있다. 이렇게나 귀엽고 신기하고 요염한 고양이의 모습을 난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 한번 개구리를 제대로 관찰해 보고 싶었다.

개구리를 보려면 일단 큰맘 먹고 개구리가 울어대는 개울가까지 나가야 한다. 조심스레 접근해도 개구리가 숨어버리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되도록 신속하게 움직여 관찰하는 것이 좋다. 개울가에 나가면 다음은 몸을 숨기고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최면을 거는 기분으로


뿐만 아니라 대개 수필집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의 이야기를 적는다는 것이다. 고양이든 개구리든 동물 하나를 가지고 저렇게 멋드러진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점에 감탄한다. 한편으로 참 힘들고 예민하고 어렵게 산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만사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반응하는 일은 참 피곤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마음을 쓰는 작가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누군가의 에너지를 생각해 본다면 너무나도 대단한 일인 것임에는 분명하다. 단편선처럼 되어 있는데 <레몬>은 지루한 일상에서 발견한 대상으로서의 레몬(과일)을 마지막 부분에서 본인만의 은밀한 비밀로 소품샵에 남겨 두는 이야기로 자기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는 이야기였고 <K의 승천>은 내가 K군과의 만남을 회고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나의 감상은 K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읽혔다.


저와 K군은 이런 희한한 사건을 계기로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되었지요. 우리는 그날 밤부터 친구가 되었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는 다시 제가 앉아 있던 배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진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하고 묻자, 그때부터 K군은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주저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K군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그것은 마치 아편과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웬 엉뚱한 이야기인가 싶으시겠지요. 저에게도 실로 엉뚱한 소리였습니다.야광충이 아름답게 빛나는 바다를 앞에 두고 K군은 그 희한한 사연을 조금씩 들려주었습니다.

"당신도 한번 해 보면 분명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속에서 점점 생물의 현상이 나타나거든요. 다른 것도 아니고 내 그림자인데 말입니다. 전등 불빛 같은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달빛이 가장 좋습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왜냐하면 저는 제가 경험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니까요. 아니면 저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또 그것이 객관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해도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주 심오한 이야기가 될겁니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로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K군은 그렇게 말했지요. 무엇보다도 K군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그 직감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비밀을 이야기 하자면 투썸플레이스 레몬셔벗에이드를 마시며 레몬을 읽었다. 소소하지만 과한 정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들에서 고양감을 느끼는 편인 것 같다. 유난히 레몬을 좋아하는 친구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 친구의 취향과 이 수필집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추후 이 책은 그녀에게 주기로 했다.


레몬을 두고 도망치는 계획을 세운 가지이가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설가 고지마 노부오는 그것을 "정신의 고양감이나 정신의 긴장감"이라고 말했다. 그의 명쾌한 정리처럼 가지이는 뒤죽박죽 생활을 이어간다는 '사소설'의 불투명성을 털어내고 권태감에서 긴장감으로 이어지는 정신의 구도를 올곧게 걸었다. 가지이는 권태감을 파괴하는 정신의 고양을 죽는 순간까지 추구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 살고자 하는 것의 위대함, 살고자 하는 것이 자아내는 유머. 가지이는 병자였기에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욱 '정신의 고양'을 바랐다. 가지이 문학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힘들고 고단했으리라 여겨지는 본인의 삶을 바탕으로 쓴 글이 주는 아스라한 분위기와 삶에 대한 사유, 그리고 진지함과 수많은 고민들이 마음을 울린다. 이전에 기록한 기억이 있는데 올곧게 사는 일은 확실히 힘들다는 것이다.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자유롭게 사는 것과 방임하는 태도로 나의 삶을 방관하는 것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또는 그 길을 걸어가는 일은 굉장한 일이다. 그런 힘은 책 읽기 그리고 몸과 마음의 올바른 균형 그리고 사유와 명상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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