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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Mar 29. 2024

싱그럽고 유해한 다정

이은규, 무해한 복숭아


아침달이라는 출판사를 발견하고 나서 관련 시집들을 여럿 찾아보았고 그렇게 이은규 시인 또한 만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일전에 친구들이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몇 번 추천을 받은 시인이라는 기억이 있어서 나름의 기대와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인 복숭아에 무해하기까지 하다니. 이렇게 마음을 안온하게 만들 수 있는 제목이 있을까. 읽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열두 번째 나무 아래 오래 서서
복숭아 열매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차오르는 생각 혹은 열매
펜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복숭아 라이브 드로잉은 계속되었다

 / 복숭아 라이브 드로잉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한다

손차양, 한 사람의 미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만들어 준
세상에서 가장 깊고 넓은 지붕

그 지붕 아래서 한 사람은 한낮 눈부신 햇빛을
지나가는 새의 부리가 전하는 말을
부고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빗발을
오래 바라보며 견뎠을까, 견딤을 견뎠을까
한 생이 간다 해도 온다 해도 좋을

/ 살구


여러 가지 과일의 이름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살구>와 <청귤> 중에서 살구에서는 위에 인용한 문장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은 정말 좋은 것이다. 누구든 어떤 사랑을 하게 되면 무조건적인 베풂을 이루게 되는 것 같다. 본인이 상처받고 힘들더라도 상대방을 나처럼 또는 나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기고 봐 주는 일, 보듬어 주는 일 모두. 다정하고 다정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중한 문장들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아주 잘 익은 살구는 빨강과 주황 그리고 노랑이 섞인 예쁜 색을 가지고 있다는 장면을 떠올렸다.


작은 양팔저울도 보입니다
무게를 재는 원리는 수평에 있지요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오랜 소원입니다만

먼저 다정한 마음과
다정할 마음 중에서
무엇을 건네줄까 궁리하는 한 사람이 있지요
도무지 잴 수 없는 무게일 때
양팔 저울을 사용해 보십시오
왼쪽 접시에 목화 씨앗을
목화송이를 오른쪽 접시에 올려놓습니다
기울어지는 마음이 더 무거운 이치

헤어질 때 가정한 사람이 덜 사랑한다
덜 다정한 사람이 더 사랑한다는 문장
그런 법칙,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마음입니다
먼 하양과 가까운 분홍보다 하양분홍이 좋아요
모든 고백은 출처 없이도 아름다운 인용
학명을 잊는 순간 꽃이 꽃처럼 보이듯

/ 목화 씨앗 속삭임


다만 다정하다는 말은 가끔 아주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인데 안아 준다고 착각하면서 부서지게 만드는 것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왜 그럴까요, 아니면 왜 그렇게 된 걸까요. 하지만 세상의 무관심과 냉소에도 역시 그런 거였군,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도 충분한 이해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소유의 의미를 붙이는 것을 쉽게 선택한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미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 반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이 시대의 진정한 요구의 반증일 것이다. 그것의 파이가 적든 많든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문득 종이 한 장을 절반으로 나눠
편지를 주고받던 그 풍경을 기억이라 부르자
지나간 문장을 읽을 때 차오르는 무엇을
구슬 같은 눈물이라고 부르지 말자
텅 빈 동공에 풍경이 차오르고 있으므로
/ 춘분


편지를 주고받던 그 풍경을 기억이라 부르며 지나간 문장을 읽을 때 차오르는 무엇을 구슬 같은 눈물이라고 부르지 말자 텅 빈 동공에 풍경이 채워지고 있다는 거 사실은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꽉 쥐어진 채 말라붙는 그런 생경한 감각이라고 고통이란 참는 것이지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니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고이는 침샘을 떠올리게 한다 봄부터 차오른 푸를 청 푸를 청 청귤은, 콧잔등을 찡긋하게 만드는 청귤의 꿈마저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한낮의 여름, 이제 가을 겨울의 대기를 향해 천천히 사라지는 일만이 남아 있을 것 만약 청귤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바구니마저 사라진다면 탁자마저 사라진다면, 그 풍경에 대한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사랑스러운 절망, 무르익기 전 시큼하다 사라진 이름들 청귤을 가지런히 썰어 흰 설탕을 뿌리는 방법에서부터, 깨진 무릎으로라도 밤의 국경을 넘어 이뤄야 할 철없는 꿈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를 청 푸를 청 멍든 빛으로 빛나는 청귤의 표정에 대해

/ 청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마음에 들었던 <청귤> 상큼한 향기가 입가에 가득 퍼지는 기분이라 행복합니다. <향긋하다>라는 단어와도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 침샘과 푸를 청을 쓰는 시인은 아무래도 감각적인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에 마음이 간다. 오감을 자극하는 직관적인 글을 쓴다는 건 아무래도 정말 대단한 일이니까. (예를 들어 나라면? 이런 상상을 할 때 생각만 많고 너무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마치 엄청나게 많이 걸어서 녹초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미로 안이었다니,라고 말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흥미롭고 행복한 독서였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이은규 시인의 다정한 호칭도 얼른 읽어 보는 걸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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