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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Apr 01. 2024

90년생 백말띠 여자

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라고 입을 떼면 어떤 사람들은 껄끄러울까 싶은 게 요즈음 시대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혹은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대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 그만큼 우리는 여성이라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너무나 과몰입한다거나 너무나 대상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축에 속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책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소개해 보기로 한다.


여자니까,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아 버렸다

경험하지 않고 원망하기보다 사고 치고 후회하는 게 나은 세계,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세계를 백인 남자들이 써낸 무수한 소설들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큰 그림을 그리는 세계를. 대의,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되어주는 거대한 숙명.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운명은 대체로 그들의 소설에서…… 음, 아니, 잠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말고는 왜 작품 속에 없는 건데? 그냥 여자 어디 없어요?

여자를 찾습니다


이다혜 기자는 신문 기자로 생활하면서 본인이 생각하고 느낀 여성이 겪는 문제와 여성의 연대 그리고 그들이 가져야 할 생각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무래도 페미니즘적 책 읽기라는 부제와 관련되게 대부분 가부장제와 남성 연대에 대한 반감 그리고 여성을 둘러싼 사회가 얼마나 여성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지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90년생 여자로 산다는 것을 제목으로 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이고 내 이야기이고 또는 내 주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택'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을 종교적으로 믿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선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불신이다. … 여자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여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아프리카/조선시대에 태어난 게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같은 말이 돌아온다. 선택할 수 없는 최악이 우리 앞에 있다고, 그래서 주어진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살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렇게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대체 공부는 왜 하고 맛있는 음식은 왜 먹나. 죽지만 않으면 될 일을.
이 글을 읽는 누구에게라도, 내가 권하고 싶은 것 하나는 기부다. 액수는 상관없다. 당신이 원하는 중요한 가치를 위해, 당신 대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만큼 기부를 해라. … 그냥 뜻이 맞는 단체를 찾아서, 만 원이라도 입금하면 된다. 이것을 권하는 이유는, 어디에 돈을 낼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의 관심사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어서다. … 이렇게 시작하면 세액공제가 아니어도 후원에 나서는 일이 가능해진다. 세상에는 늘 힘을 모아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앎에 힘에 대해서도 많이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읽는 고전의 책은 좋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남성 서사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절감한다. 고전을 읽으면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독서에서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또한 언어를 잘 안다는 것이 한 사람이 세계를 보는 폭을 얼마나 넓혀 주는지도 알 수 있다. 사소하게 쓰는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표현에 이런 의미가 있었다니! 더불어 욕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 중 여성 혐오에 점철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표현도 관용적인 걸 떠나 가능한 한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표현 중 하나다. '동가홍상(同價紅裳)'에서 유래한 말인데 '홍상(紅裳)'은 다홍치마로 처녀를, 청상(靑裳)은 푸른 치마로 기생이나 청상(靑孀) 과부를 뜻한다. '같은 값'이라니, 뭐에 값을 따지는 것일까?  … 이 대목에서, '매사에 시비를 걸 요량이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살 작정인가'라는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런 문제 제기는 나도 이해한다. 모든 독자가 자기를 갈아 넣어가면 독서를 할 필요는 없다. '성차별을 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라 그저 그 시대는 그랬을 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걱정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여성 독자는 많은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기쁨은 아래와 같은 문장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스무 살 때 배웠던 몇몇 좋아 보였던 가치들이 이제는 낡게 보인다는 점이 기쁘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더 많은 것들이 좋아졌고, 나 자신이 더 멀리까지 왔다는 믿음이 생긴다. 동시에 지금의 내가 믿고 있는 가치들 또한 매번 점검하고 업데이트 혹은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닿는다. … 그러니 되뇐다. 가이드 없음, 전진 가능.
부디 바라기는 이 책이 한국의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읽는 즐거움과 공감의 원천이 될 수 있기를.


젊고 어린 여성들이 이 책을 읽으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벌써 이 책도 꽤 오랜 시간이 흘러나오는 담화가 되었다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누군가는 정의를 말해야겠지,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야겠지, 이런 과정 중에서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정의와 진실이 맞는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 것들은 스스로를 뒤로 물러서게 하기 좋기 때문이다. 적어도 건강한 삶과 생각과 정신에서 나오는 올곧은 신념은 분명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누군가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해야 하기에 이 책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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