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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 Apr 03. 2024

지리멸렬한 삶

권여선, 각각의 계절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사슴벌레식 문답>


<사슴벌레식 문답>이 아주 유명하다고 그리고 매우 좋았다는 가까운 이의 추천사를 들으며 책을 선물 받았다. 사슴벌레식 문답이 주는 글의 전체적인 이미지나 분위기는 70년대 또는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과거를 복기할 수 있었고 어디로든 들어오는 것들은 어디로든 나간다. 그건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것들이라 알게 모르게 또는 알지도 모르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것들이다. 그것은 인간관계, 사회적인 사건, 개인이 겪은 경험과 같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많은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실버들 천만사>나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가 아주 좋았다.


다 읽었으면 돌려달라는 말, 그 말을 할 때의 경서의 굳은 얼굴과 쭈뼛한 말투 속에서 나는 이제야 깊은 고통과 두려움을 읽어낸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어어,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그거 아직 다 안 읽었는데,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때 경서가 할 말을 잃은 듯 나를 망연히 바라보던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뼈가 저릴 듯 부끄럽다. 당시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물, 과장된 연기만 하도록 태엽 감긴 무無였다.

<기억의 왈츠>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 아무것도 없는 개미굴 같은 폐광을 절대 굴착당하지 않으려고 철통같이 지켜내려 했던 그때의 내 헛된 결사성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끔찍한 모순이며 기망인가.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 봐.

<기억의 왈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것에 반응한다. 이것은 대개 부정적인 것이 시초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 불쾌감을 지우다 보면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그것에 깊게 빠지기도 한다. 타인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거울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나를 투명하게 비추는 것이 아닌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이해되는 나는 나의 생각보다 보잘것없는 별거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이 과정은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모습마저도 실제 나의 한 부분인 것이고 그것이 내가 나를 투명하게 (마치 유리처럼) 보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던 장면들이기도 한 것이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움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전체적인 글들의 내용이나 어렴풋이 또 떠오르는 기억을 되짚어 볼 때, 삶이란 참 지리멸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에서도 실제에서도 하지만 그런 감상에 있어서 우울에 젖는 일, 왜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더  나은 삶을 찾아보자라는 긍정적인 희망의 메시지와 같은 이분법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삶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담담하게 정의하고 싶어 진다.


어쩌면 삶에 대해 너무나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 그리고 이것을 꾸역꾸역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을 얻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노력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지 반추해 본다. 하지만 그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루를 되짚어 봐도, 일주일을 한 달을 일 년을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돌아본다면, 어떤 날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지? 어떤 날은 정말 죽어도 좋겠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 하지만 금세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삶을 연장하고 연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그런 힘을 만들어 주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준다는 감상을 남겨 본다.


눈을 감으면 환영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가을 햇살이 하얗게 내리는 마당 한복판에 여자가 서 있다. 이마에 흘러내린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날리자 여자는 손을 들어 거칠게 이마를 훑는다. 빛 아래 단풍 같은 옷차림에도 여자는 누가 오랫동안 창고에 넣어두었다 꺼내놓은 기묘한 인형처럼 빛바랬다. 발밑에 드리운 짧고 짙은 그림자 때문에 그녀는 더 스페셜한 오브제처럼 보인다.
여자를 둘러싼 찬란한 햇빛이 공중에 은빛 거미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잿빛 음영이 드리우면 빛나던 베일은 수의처럼 뻣뻣해진다. 생명의 어두운 결정체들이 점점이 박히고 누런 고치들이 매달려 흔들리는 검은 그물은 그녀 자신이 내뿜었지만 이미 그녀 자신을 가두는 거대한 망이 된다. 이윽고 그녀 스스로 고치가 되고 캄캄한 밤이 그녀를 덮는다.
최근 본 것 중에서 가장 놀랐던 것 중에 하나는 대부분의 또는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이 거대한 세계와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래서 내 것으로 만들고 타자를 탐구하고 탐닉하기 위해 그것을 내가 온전히 가질 수 있다는 착각과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를 너무나 고단하게 만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런 인간이니까. 그냥, 그저, 원래대로 성정이,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이것도 그것도 모두 그냥 그렇게 이미 짜여 있고 만들어져 있는. 운명론이나 바꿀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비관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게 전부다. 매번 조금이라도 더, 조금씩 가벼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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