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매의 경우 예민함은 묵살되기 마련이다. 정말로 다행히도 아이는 치이면서 터득하게 된다. 예민함은 방관되고 때로는 매도 부른다는 사실을. 무딘척하며 예민함을 감추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억눌린 민감성은 가끔 터진다. 나는 내내 울보였다.
그 당시 포목점을 하셨던 부모님은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그래서 애기를 방에 눕혀두고 가게를 보셨다. 지금처럼 애를 맡아 주는 곳은 없었기에 할아버지가 말 그대로 애를 보시기만 하셨다고 애는 배를 곯은 채 울다 지쳐 잠들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헤픈 모양이라고 엄마는 본인 탓을 하고는 하셨다.
빈 방에서 울고 잠든 내 어릴 적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억을 못 해서 일지도 모른다. 요즘 그러면 학대라고 하겠지만, 그 시절은 다 그렇게 컸다. 지금처럼 아이에 대한 배려를 해 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기에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그 시절을 버틴 것이 때때로 대견하다.
좀 자라자 예민함은 피부에 닿는 것들에 향했다.목에 아무것도 걸치지 못했다. 목도리와 목티는 입지 못했다. 지금은 고무줄 바지나 스판이 흔하지만 그때는 드물었다.그래서 일 년 내내 체육복 바지를 입고 등교를 했을 정도였으니 어딘가 불편하면 못 견뎌했다.지금도 옷의 소재에 예민해서 택에 적힌 부분에 집착이 있다.
또한 사람들의 말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는 데에도 민감했다. 게다가 그 감정에 길게 휘둘렸다. 그 묘한 꼬인 감정에 상처받고 또 상처받았더랬다. 반대로 그 감정이 담긴 말을 하고는 미안함에 못 견뎌하고는 했다. 후회하는 일이 너무 많아 괴로웠다. 상처받지 않는 것도 상처 주지 않는 것도 어렸을 때는 어려웠다.
나이가 들면서 좋았던 것은 예민함도 무뎌진다는 거였다. 이제 상처를 받았다는 걸 제법 잘 잊는 거다. 큰 노하우가 생긴 건 아니다.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연륜으로 알게 되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남 탓하며 넘어가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에 그 예민함을 끌어낸 사건이 있었다.
요즘 필라테스를 다니고 있는데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우리 동 앞에 있어서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라 레깅스 차림으로 다니기 편했다. 그 위에 길게 엉덩이를 덮는 상의를 입는데 한 번은 운동 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서 있었다. 유치원정도 되는 쌍둥이를 데리고 주차장 비상구에서 시끄럽게 올라오던 애들 엄마가 내 옆을 지나며나를 아래위로 훑는 시선이 느껴지고 이내 큰 소리로"어마바지도 안 입고 나왔나 봐 쯧"하며 혀를찼다. 순간 나는 그곳에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가 뭘 들은 건가 멍했다. 누가 봐도 레깅스를 입고 상의로 엉덩이도 가렸건만.
밖으로 나가는 뒤통수에 대고
'내가 벗든 입든 아니 대체 자기가 무슨 권리로 내 옷차림을 지적하는 거야. '말해야했는데...
사실 아무 말도 못 한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떠올려보니 애들 다 듣는 데에서 나이로 보아 많이 봐도 30대 중후반 10살도 넘는 차이. 왜 대놓고 타인에게상처를 주는 걸까 상대에게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근데 슬프게도 운동 나가면서 매번 그 순간이 떠오른다. 분노는 옅어졌지만 여전히 상처로 남았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다. 나이 들면서 받는 상처도 있다. 나잇값을 해야 하고 그래서 치러야 할 대가들이 꽤 생겼다. 어른이라 참아야 하고 용서해야 할 것들은 늘었지만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가졌던 권위는 이제 거의 없다시피 하다.
씁쓸한 맘이지만 상처는 안 받기 어렵다. 예민한 내가 쿨해져야 하는 건데 과연 가능할까 그런 때가 오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