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고작 세 블록 걸어 나오면 된다. 대륙의 겨울 대신 외딴 여름 섬을 택한 유럽인들이 야자수가 드리운 빗살무늬 햇볕 아래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곳까지. 바닷길 따라 수천 마일을 씻고 온 싱그러운 공기가 내 머리를 알몸으로 휘감으며 '이곳에서는 맘껏 숨 쉬어도 된다'며 속삭인다. 파도로 두 팔 벌려 마중 나온 대서양에 저마다의 푸념들을 잠재우며 우리는 그렇게 지구별의 미소한 동그라미 하나가 된다. 마치 다른 방법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나로 무공해하게 존재하는 이 순간은 너무도 귀해서 느린 발걸음으로 음미해야 한다. 계획했던 뭔가가 다 잘 될 거라는 내면의 위로는 덤이다. 잡념은 잡념대로 테트리스되어 사라지고 본질 되는 생각들만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는 드디어 내가 숨 쉬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아는데...
알.았.는.데.
돌아가는 길, 그 세 블록이 아까워 또다시 지름길, 그 육상트랙에 날 몰아세웠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직진만 한다면 집에서 어학원까지는 정확히 8분이 걸리니까. 나에게 돌아서 갈 여유 따위는 없으니까. 방향성 없는 노예의식에서 비롯한 이 변태적인 자책 행위에 관성을 느낀 나는 "안 돼요. 싫어요."라고 나지막이 읊조리고 마침내 세 블록 걸어 나왔다. 가만히 좀 있으려고.
우리 경제는 대체 누구를 위함인지 알 수 없는 "괄목할만한" 성장지표를 내놓고는 사회 속 개인의 방향성을 앞으로, 또는 위로 한껏 쳐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일단 달려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경쟁 사회를 위로하려고 나온 말이 고작 "인생은 마라톤"이라니... 우리의 요구사항은 호도됐고 끝내 조삼모사의 대답을 듣게 된 꼴이다. 결국 향해야 하고 도착해야 한다. "늦어도 좋으니 끝내는 이겨내라!"라는 이 고집스런 메시지는 현재의 우리에게 큰 물음표를 던져준다.
이겨내고 성취해 낸 삶의 향연은 연말 시상식을 통해 생중계된다. 미디어를 통해 느낀 내적 친밀감 탓인지 그들의 진심 섞인 수상소감은 쉽사리 우리의 심금을 울리곤 한다. 또한 그 남루한 인생 시작점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 다이내믹에 매료된 대중들은 더 크게 환호한다. 시상식 연단은 가늠할 수 조차 없이 높아 상 받고 내려오면 그만일 수상자들을 그토록 긴장케 하나보다. 자화자찬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형태의 쇼는 요즘 다양한 형태로 심심치 않게 보인다. 특별한 게스트의 특별한 이야기를 더 특별하게 들려주는 인터뷰 프로그램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목표지향을 선전하고 있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 또한 한 사람의 인생이 치솟는(때로는 치닫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얻어 걸리기를 희망하며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매 번 방송된다. 현실을 떠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휴대폰과 티비를 켠 대부분 사람들의 구미에는 이보다 제격일 수가 없다. 높은 데서 떠드는 그 인간승리 심연의 정의는 무엇이며 이렇게도 유해한 컨텐츠에 동요되어 끊임없이 부족한 자신을 타이르는 우리들은 어디를 향하는가? 그리고 그 상은 왜 저 높은 곳에 매달아 놓고 한 명만이 누릴 수 있게 하는 걸까?
동방의 작디작은 나라에서 걸출한 스타들과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세계를 뒤흔들었다. 또한 해외 어디에서든 삼성, LG, 현대 제품을 볼 수 있다. '우수하다'라고 여겨지는 우리들의 컨텐츠는 국가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조했고 높은 이곳에서 풍요로울 줄만 알았던 우리는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생률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현실적인 타이틀을 얻게 됐다. 우리의 위상과 나의 불행으로 직결되는 이 딜레마는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나"로 살 수 있게 내버려 달라는 신음소리로 해석된다. 외면만을 치장하게 되는 국격뿐 아니라 그 안에서 진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있어야 이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번아웃은 애진작 왔기에 우리는 쉬어가야 하고 마치 무기와도 같은 (교육에 의한) 맹목적 애국을 할 때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통해 우리가 살아갈 한국을 실속 있고 멋진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그래도 될 만큼의 자존감을 가지게 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관성 속에 암울한 내일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곳 지구 반대편은 모든 게 조금씩 늦게 돌아간다. 우리말 "빨리빨리" 반대어쯤으로 해석되는 "뜨란낄로(tranquilo)"를 유독 많이 듣게 되는 것이 가장 먼저 이를 방증한다. 그냥 있거나 시에스타를 하는 게 더 나은 생산성을 위함으로 결부되지 않고 그저 웰빙으로 존중된다. 우리만큼의 경제적 수준과 국제적 위상을 가진 스페인이 우리보다 더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뜨란낄로"한 그들 틈에서 배울 수 있었다.
취미 생활을 갖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시간 적 여유가 있다. 취미를 특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와 달리 아웃풋이 꽤나 형편없고 의미 없어 보인다. 일례로 현지 친구 중 하나가 밴드에서 색소폰과 보컬을 하는데 특별한 목표의식이 있다기 보단 친구들과 합주하는 시간 자체를 즐기는 모양이다. 결국 그 또한 일의 생산성에 간접적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들의 시선은 우리처럼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다.
옷을 벗고 다닌다. 아가씨부터 할머니까지 아주 자유롭게 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는 걸 목도하게 되는데 심지어 누드비치가 아닌 해변에서도 정말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노브라로 활보하곤 한다. 유두의 모양을 덮고 가슴의 형태를 감추는 것을 현대의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나아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무슬림은 머리카락뿐 아니라 체형 모두를 가린다. 이 것은 남성의 본능이 여전히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동일한 현상으로 국가나 집단에 따라 여성에게 지워지는 짐(브라, 히잡)의 무게만 다를 뿐이다. 법치하에 여성이 남성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모두를 대표하는 국회에서 절반의 목소리를 내는 지금의 세상에서 아직도 여성이 성적 대상화 되는 데에 너무 쉽게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게 통탄스럽다. 처음엔 내게도 너무나 생소한 광경에 두 번씩 눈길이 갔다. 이성애자 친구에게 반라의 여성을 보고서 발기라도 되면 어떡하냐고 물었었다. 이윽고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잘 가려야지."
공존하는 인간이기로 한 이상, 가려야 하는 건 그녀들이 아니라 그들인 것이다. 해변에서 느낀 또 한 가지는 남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만한 자존감 가지고는 상의탈의가 불가한 한국과 달리 이 곳은 자신이 입고 싶은 만큼 입고 벗고 싶은 만큼 벗는다. "우와... 무슨 용기로 저렇게 입고 나왔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종종 들리는데 그때마다 이 곳의 사회악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음속으로조차 타인을 평가하며 오지랖 떨지 않는 그들은 그 시간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더 소중히 다룬다.
1년 내내 축제다. 세계적 명성의 드랙퀸 선발대회는 이곳 주요 도시마다 열리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이들의 문화다. 다르면 다른대로 빛날 수 있다는 존중과 포용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축제는 단연 내가 가장 아끼는 축제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아직도 화려함 치사량을 넘어선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을 짓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가톨릭 영향권 아래에 있던 국가들은 성탄절, 성주간, 성축일 등 성스럽다고 여겨지는 모든 날을 일하지 않고 쉬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각 마을을 수호한다고 여겨지는 성인들이 있어 그들의 축일 또한 축제와 같이 기려진다. 또한 100여 대의 대형트럭이 동원되는 퍼레이드가 있을 때면 모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나와 서로에게 농담을 건넨다. 교황, 수녀, 여장남자, 노인, 유명인 등 다양한 군상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콧대 높아봤자 그저 인간"이라는 골자 있는 행위예술을 하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얼키설키 얽혀 무리를 만들고 심지어는 시한부 환자도 나와서 축제를 즐긴다. 그럴 수 있도록 되어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적 소수자들이 늘 함께한다. 알비노 환자들이 복권을 팔아 양지에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하는 것, 노인 혹은 장애인이 버스에 탑승하는데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누구 하나 눈 흘기지 않는 것, 성소수자 커플이 손잡고 걷는 것이 재차 뒤돌아 볼 일이 아니라는 것 등 이 사회에서는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 또한 온 가족이 보는 공영방송, 그것도 피크타임 때에 아주 색다른 커플매치 프로그램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젊고 예쁜 이성애 커플뿐 아니라 성소수자, 그리고 90이 넘은 노인들까지 자신의 반쪽을 찾기 위해 출연한다. 설레는 첫 만남을 지켜보는 우리는 사랑의 모양과 나이를 떠나 그것이 그저 사랑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관성 속에서 지름길로만 내몰린 나에게 축제와 취미, 관용과 여유가 알려준 삶의 방향은 "나"라는 곳이다. 사회의 구속에서 개인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영감은 지름길에 없었다. 이렇게 돌아가는 길에서 하나, 둘 주워 담은 이야기들을 나눠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