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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딩 Jun 24. 2024

사랑니 뽑으러 가던 길 위의 라라랜드

비 오는날 라라랜드의 차차차를 생각하면서 길을 걸으면, 세상 모두가 나와 함께 차차차를 춰 줄 것만 같은 환상적인 기분에 온몸이 떨린다.

분명 휴대폰 날씨 어플 왈 비가 내린다는 아침에, 비가 내리지 않는 걸 보면 괜시리 사심 가득 담아 챙겨나왔던 내 보라색 우산이 약간 무안해진다. 아침 8시에 확인한 스크린에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고, 사랑니 하나에 잔뜩 긴장해 결국 칼을 갈고 뽑으러 가기로 한 비장의 오늘의 나는 살짝 의기소침해진다. 밖은 선선했고, 비는 오지 않았고, 사람은 많았다.


초록 괴물 모양을 한 에어팟 케이스에서 에어팟을 뽑아 귀에 꽂는다. 아, 좋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세상과 막을 쌓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음악의 새로운 세계와 영접했다는 그 느낌. 신나서 혼자 어깨에 힘 가득주고 싱글벙글 걸어갔다. 아,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그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질 법하지 않은 의상으로 슬리퍼를 끌며 나왔는데, 저 반대편 여자는 왜 나를 보고 계속 씩 웃는걸까.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러한 맹목적인 환대는 거절하는 것이 맞다고 학습한 내 두뇌가 나에게 도망을 권고한다. 


“안녕하세요! 혹시 어디가는 길이세요?” 엄마야, 늦었다.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에어팟을 뺐고, 나의 세계는 망가졌다. 그녀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다.


“아 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정말 급했다, 예약시간까지 오분남짓 남은 상황이었기에. 내 진심이 잘 전달되었으리라 믿으며 눈으로 슬쩍 눈인사를 건네도 도망의 태세를 취한다.

“아 저기, 지금 저희가 인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요, 혹시 동의서 작성을 위해서 사인한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인 쯤이야, 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불과 약 30초 뒤에 저주하게 된다. 이 이후로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을 나열해보자면, 나는 사인을 해줬고, 그녀는 스리슬쩍 모금을 이야기했고, 카드 넘버를 요구했고, 나는 거절했고, 다시 한번 그녀는 현금 계좌이체를 요구했고, 나는 다시 거절했다.

“너는 xx야, 이런 xxx”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아, 비오지 않아 무안했을 내 보라 우산의 심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안한 기분에 머리가 치끗 솟는다. 나는 다시 에어팟을 꼈고, 유유히 떠나는 승려의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신랄한 욕이 내 뒤통수를 저릿하게 한다. 말이 총알이었으면 나는 진작에 즉사했다.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더더더 높였다. 세상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고 믿어버렸다. 신이 났다. 춤을 추고 싶었다. 몸 속에서 흥이 차올랐고, 세상이 보라색이 되었고, 귓가와 내 주위 세상에서는 신명나는 비트가 울린다. 육교 위를 바로 옆에서 날아가는 까치와 함께 훌훌 춤을 추며 건넜고, 주변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이 춤을 춘다. 각자 차차차, 턴하고 차차차, 다시한번 돌아서 차차차. 나에게 웃어주며 다 같이 행복하게 춤을 춘다. 어, 저 멀리서 아까 봤던 익숙한 비주얼이 춤을 추며 다가온다. 아 그녀네, 아까 봤던 그녀네. 화가 났었지만 나는 지금 춤을 추고 있으니까 화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서 손을 건넸고, 나는 이에 화답했다. 같이 손을 맞잡고 보라 세상 속에서 춤을 추니까 위아더 월드가 바로 이거겠구나, 싶었다. 그녀와 함께 차차차,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춤을 너무 격렬하게 췄던 걸까. 에어팟이 빠졌다. 상상은 상상일 뿐, 나는 비오지 않는 거리를 졸졸 걷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상상으로 그녀와 함께 춤을 췄고, 나 혼자서 용서했고, 꽁꽁 싸두었던 왜저래에 대한 감정을 털어버렸다.


당신이 화가 났고, 보라색 우산에게도 미안한 날씨였고, 비도 안내렸고, 우울한 모드라면. 라라랜드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결단코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같이 풀어버리고, 씻어내면 그 누가 내 뒤통수에 총알을 저격해도 가소롭다는 듯 툭툭 털어버릴 수 있다. 나는 그녀가 밉지 않다. 그녀도 그저 라라랜드 세계 속 한 명일 뿐이겠지. 나 혼자 춤추고 잊어버리면 그만인 보라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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