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가람 Aug 25. 2024

입장차이 5

도전적 혹은 무모한

"그 사람 참 도전적이야."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개인적으로는 칭찬에 가깝게 들린다. 뭔가 주도적이고 용기 있고 어려움을 잘 헤쳐나가고 강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여러분들도 그러하신지.....

도전적(挑戰的)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돋울 도'에 '싸움(시합) 전' 자를 쓴다. 용맹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필연적으로 승패가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승리를 할 것인가 패배를 할 것인가. 패하고자 도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도전'에는 승리를 위한 염원 혹은 승리에 대한 확신도 들어 있을 것 같다. 승리를 바라고 믿어서 도전을 한다면 그러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는 근거말이다. 지는 싸움을 하고자 도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기기 위한 전략과 자원을 냉철하게 따져보고 도전을 해야 도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10번째 도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9번의 계획된 실패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럴만한 자원과 끈기와 흔들리지 않을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실패에 대한 인정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전과 젊음은 하나의 분류로 묶여있는 것 같다. '젊음=도전'이라는 생각이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스며들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젊은이들은 당연히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도전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약하다는 듯한 인식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퍼져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젊은이들 스스로도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주 목격된다는 데 있다. 실패 혹은 실수를 배움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용기를 잃지 않고 재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무슨 말인가 하니 과거의 경험에 철저히 지배받으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연속되는 실패 속에서 주위에서 비난과 질책만 들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다시 도전하려고 할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까? (우리의 생존본능이 위험으로부터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반대로 연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이전과는 달라진 점에 초점을 맞추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인정해 준다면 그리고 믿어준다면 다시 도전하려고 할까? 여전히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까?( 우리 대부분은 인정에 목말라있다. 정말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성공한 사람은 뭐냐라는 물음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만큼 드물기 때문에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그 사람의 재능이라고 말이다.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라고 강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노력이 부족해서 성공을 못하는 것이라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은가? 천재적인 발명가인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즉,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종종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실은 이것이다. 잡지사 기자의 ‘당신의 성공비결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에디슨은 ‘99% 노력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노력한다. 난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1%의 영감이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자영업자와 취준생, 입시생만큼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너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더 노력하지 않아서이다라고 쉽사리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근래 노력의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듯하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회가 다변화되고 시시각각 새로운 도구들이 생겨나고 있다. 요령 좋은 사람들은 그런 도구들을 보면 어떻게 활용할지 빨리 감을 잡고 새로운 산업영역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말이다. 이 영역은 정말로 재능이 요구된다. 세상을 읽는 흐름, 가치를 알아보는 혜안,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더 선호할지 알아채는 미래를 읽는 능력까지 재능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여기서 노력을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이미 이런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해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내가 이런 분야에 재능이 없는지 있는지 해보기 전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당연히 해봐야 한다. 그런데 재능이 있어도 처음부터 성공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렇다면 성공할 때까지 계획된 여러 번의 실패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우리는 몇 번의 실패까지 감당이 되는 걸까?


예전에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여러 직종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취재해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중에서 아직까지 유독 기억에 남는 기업가가 있다. 상당히 젊은 분이었는데 사업이 하고 싶었고 성공할 자신도 있었는데 자본금이 없었단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카드란 카드는 모두 발급받아서 최대한 대출을 받아서 사업자금을 썼단다. 그 덕분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고 성공했다고 했다. 결과를 보면 성공을 했으니 그는 대단한 사람이고 추진력이 있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카드 채권 추심을 하던 지인이 한 이야기 있다. 지방 대도시에 큰 쇼핑몰이 새로 생겼고 거기에 의류가게를 오픈한 사장님이 있는데 이분 역시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카드를 여러 장 발급받아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쇼핑몰은 생각보다 유동인구를 끌어오지 못했고 분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도가 나버렸다. 그 사장님은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래서 카드 빚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카드채권추심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다. 무모한 선택이었고 충동적인 선택을 해서 망하게 된 것이다. 

자,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리는가? 두 사람이 한 행동은 같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확연하게 갈린다. 한 사람은 도전을 한 것이고 한 사람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런 판단의 근거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결과가 좋으면 과정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우리의 암묵적인 동의가 그 근거가 아니길 바란다. 어쩌면 성공시대에 나왔던 그 젊은 사업가는 같은 상황이 닥쳐도 헤쳐나갈 길을 찾아서 사업을 성공시켰을 수도 있다. 개인의 능력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여기까지 동의가 된다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는 도전을 권하고 있는지 무모함을 권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수능이 다가오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부모님의 챙김 혹은 간섭 때문에 안 그래도 초조한데 더 미칠 것 같다고 어쩌면 좋겠냐는 글들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공부는, 학습은 정서가 안정이 될 때 가장 효율이 높아진다. 압박을 준다고 해서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놀고 있는 듯 보여도 마음속으로는 팽팽히 당겨진 신경을 누그러뜨리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부도 재능이 요구된다. 과거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이 드물던 시절에는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더 유리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학원이 기본값이 된 지 오래지 않은가?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렇다면 노력은 다들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여기서 성적을 가르는 것은 재능이 될 것이다. 모든 학생이 1등이 될 수는 없다. 당연하다. 어떤 그룹에서든 꼴찌는 존재한다. 그러나 내 자녀가 1등이 되지 못하거나 꼴찌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누군가는 1등이 되고 누군가는 꼴찌가 된다. 그런데 내 자녀는 그러면 안 된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지원과 애정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부모는 부모대로 힘들고 자녀는 자녀대로 힘든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인정하고 자유로워지자는 이야기다.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녀가 부모에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얼마나 큰지 상상이 되는가?) 이 모순이 빠른 시간 안에 극복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라도 논의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라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도 능력치도 다르다. 같은 일을 해도 완성도는 차이가 나며 사용되는 자원도 차이가 난다. 각자 잘하는 것이 있고 그 '잘함'의 수준도 다 다르다. 그런 차이가 조금씩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서로 다른 삶이 만나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필요 없는 직업이 있지는 않을 터, 어쩌다 보니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군이 벌이가 좋아 같은 시간 같은 노력을 들여도 수입이 더 좋을 수 있고 어쩌다 보니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군이 벌이가 좋지 않아서 같은 시간 같은 노력을 들여도 수입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벌이가 좋은 직업군으로 옮겨가고 싶을 때 일정한 능력을 갖추면 옮겨갈 수 있고 또 그렇지 않다 해도 현재 머물고 있는 직업군에서 얻는 수입으로 먹고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면 그것으로 직업의 역할은 충분하리라. 물론 벌이가 더 많다고 벌이가 적은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고(인격적으로 말이다) 직업군을 옮기는 데 실력 말고 성별이나 나이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직업 간 이동이 자유로울 수 있고 각각의 직업이 가지는 가치를 인정한다면 벌이가 낮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기죽을 이유도 벌이가 높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으스댈 이유도 없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맡은 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 번의 도전에 대한 결과로 너무 많은 것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보면 어떨까? 재도전의 길이 열려있고 그 비용이 감당할만하며 주위에서도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면, 기회는 또 온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재도전하는 사람들을 믿어줄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것이고 우리의 젊은이들도 조금은 여유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상위권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비하하며 무망감속에 허덕이는 일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알고 나를 믿고 당당하게 도전하는 사람의 단단함은 쉽사리 부서지지 않으며 주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나를 알지 못하고 주위의 말을 믿고 등 떠밀려 도전하는 사람의 불안정성은 그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며 주위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한계치 이상 능력을 짜내지 않고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아도 자기 몫을 해내고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675181‘천재는 99% 노력과 1% 영감…’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명언 | 중앙일보뇌과학자 정재승이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는 에디슨의 명언을 재해석했다. 정재승은 에디슨의 명언을 두고 "99%의 노력은 당연하고 (화룡점정으로) 1%의 영감이 중요한데www.joongang.co.kr * 사진출처 : Pixels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675181

* 사진출처 : Pixels

작가의 이전글 생각의 전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