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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미미스 Feb 05. 2017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2차 대전 중 가족과 헤어져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는 가족의 소식도 모른 채 2년 넘게 수용소에 지내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희망을 버리고 일찍 삶을 포기한 사람들과 가스실로 끌려가는 가운데도 당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춥고, 배고프고, 힘든 수용소 생활에서 그를 버티게 해줄 수 있던 것들 중 하나는 그의 아내였다. 다른 수용소로 보내진 아내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추억은 그가 생을 포기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였다. 그저 아내가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지만. 


나는 당시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

나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그저 누군가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삶은 가치 있다. 그 사람이 내 행복의 마중물이 되어줄 수 있다. 예전에 본 박찬욱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임수정이 연기한 '영군'의 대사 중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다. 


아, 나도 존재의 목적 한 개만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는 결국 사랑이 그 '존재의 목적'임을 암시하며 끝났는데(오래 전의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부디 모두 생의 '존재의 목적' 하나씩 찾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구원이 되어 줄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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