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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06. 2024

전지영 「언캐니 밸리」리뷰

<혐오의 이름으로>

  <혐오의 이름으로>



 내용 요약

  왜소증을 가진 ‘나’는 택시 운전사로 일한다. 또한 승객들을 관찰하고 크로키를 그리는데, 자신이 그들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동물의 신체를 집어넣는다. 주 고객은 청한동 언덕을 오르는 이들이다. ‘나’는 한 승객에게 집착한다. 자신을 김승민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언덕 위 노부부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그녀가 그녀의 일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며 그녀의 크로키에 야만성이 살아있는 부엉이 눈을 그려 넣는다. 그녀의 SNS를 염탐하고 그녀에게 콜을 받기 위해 애쓴다.


  소설은 ‘나’가 경찰에게 증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김승민)가 당한 염산테러 때문이다. ‘나’가 경찰에게 제공한 진술과는 달리, 사실 ‘나’는 그녀를 본 마지막 날 그녀의 부탁에 따라 함께 언덕을 올라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그 저택에서 하는 일이란 가만히 앉아있는 대가로 노부인에게 돈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녀는 그 집에서 알약을 훔치고 있다. 그것을 먹거나 되팔아 이득을 보기 보다는, 몸에 옮겨 붙은 그 집의 향에 기뻐하는 것처럼 그 넘치는 부를 파편이나마 옮겨오고 싶은 듯하다.

  '나'는 그 날 언덕으로 향하는 손님을 그녀 외에도 여럿 태웠다. 그중 하나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약병과 주삿바늘을 챙긴 중년 남자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담벼락 밑에서 담배를 피우던 '나'에게 집의 주인인 노부인이 접근했다. 김승민에 대해 묻는 '나'에게 그녀는 집에 드나드는 이들이 많기에 김승민을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이들은 (알약을 포함해) 항상 무언가를 더 얻어간다며 오만원 지폐를 내밀고, 자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암시하고 돌아갔다.

  경찰은 '나'에게 그녀가 김승민이 아닌 장신영이며 노부인에게 요가를 가르쳐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노부인의 거짓말이라는 ‘나’의 말은, 풍경사진만 있는 SNS로 계정 주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에 묵살 당한다. ‘나’역시 노부인이 그녀에게 염산을 뿌렸을 가정을 접는다.

  ‘나’는 여전히 택시를 몬다. 승객의 바람대로 언덕에 그녀를 내려주고, 그도 따라 내린다. 그는 처음으로 초인종을 누른다. 답이 없자 그는 자갈을 쥐고 딛으며 담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생계 수단으로 택시 운전을 하며 취미로 승객들의 크로키를 그린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은 그림이지만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의 그림은 승객을 관찰한 뒤 보지 못한 나머지 부분들을 동물로 채우며 완성된다. 동기들은 역겹고 변태스럽다고, 지도교수는 점잖게 다 드러내는 건 아름답지 않다고 그를 비웃고 만류한다. 그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나’의 그림이 팔린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나’가 집착하는 승객인 ‘김승민’('나'에게 직접 말해준 이름이다.)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무슨 까닭인지 그녀에게 매료되어, 그녀를 자신의 택시에 승객으로 태우려고 SNS를 뒤지고 주변을 맴돈다. 그녀의 목적지는 언제나 청한동 언덕집이다. 상위 계층도, 중산층도 결코 아닌 그녀는 그 집을 드나들며 노동에 비해 큰돈을 받는다. 하는 일이라곤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는 노부부의 시선을 받는 것. 물론 그것은 그녀에게서 전해들은 진실이다. 사실임을 확인할 방도는 없다.

  ‘나’는 그녀를 응원하는 듯하다. ‘나’는 왜소증을 가진 장애인이며 작은 신체에 맞춰 개조된 택시를 몬다. 말하자면 ‘나’는 경제·사회적으로도 사회 바닥인 동시에 신체적으로도 밑바닥에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시선에 예민하다. ‘나’가 그녀를 맴도는 것, 그녀의 스케치에 야만성이 담긴 부엉이의 눈을 박아 넣은 것,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고용인을 배반하고 일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것은 동질감 때문이다. ‘나’의 신체는 사회에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실제로 그것이 뭐든지 간에) 떳떳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세상에, 사회에, 시선들에 저항(적어도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발적이고 변태적인 크로키가 그 수단이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옷에 묻은 재력가들의 냄새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가 깨고 나오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개화는 일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청한동 저택을 오른다.


  그녀(김승민)는 속물이다. 그녀는 청학동 출입을 기꺼이 수행한다. 그곳에서 부자들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언뜻 사회전복적인 수행으로 읽힐 수 있으나, 후술되는 언급이 그러한 가능성을 일축해버린다.

  “노부인의 집에 다닌 뒤  내 몸에서 그 집 향이 나요. 난 이 냄새가 너무 좋아요.”
당신은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인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엔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게 참 많아요.”

  자본이라는 가치를 부러워하고 쫓는 것을 넘어, 그녀는 그것을 거의 숭상한다. 마치 재력 너머에 ‘돈으로 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상상하여, 재력을 손에 쥔 이들에게 그럴만한 능력을 부여하고 그들을 숭배한다. 그녀가 노부인의 집에서 훔치는 알약들은 결국 그 집의 냄새처럼 그들의 작은 단편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나’의 시선은 예술가의 시선으로, 그녀를 포함한 타인들을 측정하고 평가하고 그림에 그려넣고 불완전한 부분들을 감히 동물로 채워 넣는다. 그렇다면 ‘나’에겐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 ‘나’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성이다. 왜소증을 가진 ‘나’, 어머니의 손길에 가슴팍을 드러낸 채 사진기사들에게 사진을 찍힌다는 시선의 폭력에 노출된 바 있는 ‘나’는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고 두려워한다. ‘나’를 향하는 시선은 언제나 혐오가 깃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택시에 탄 승객들을 멋대로 자신의 시선을 통해 객체화하고 결핍이 존재하는 부분(결핍이 존재한다고 감히 판단하는 부분)에 동물을 이어 붙인다. 그 그림엔 불쾌한 골짜기(언캐니 밸리)가 깃든다.

  ‘나’의 작업, ‘나’의 시선 역시 폭력이 아닌가? 굳이 추상적인 부분까지 건드리지 않더라도, ‘나’가 승객들로부터 크로키를 그려도 된다는 동의를 받았다는 언급부터가 어디에도 없다. ‘나’의 시선은 자신의 맨살을 촬영하는 사진기사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역겨운 폭력이다.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이들에게서 혐오감을 읽는 ‘나’는 그 자신이 저지르는 이중적인 행동들로 인해 혐오스럽다.


  청한동 언덕에선 언제나 무언가 흘러내린다. 가진 자들은 위에, 없는 자들은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회의 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청한동 언덕에서 낮은 지대로 빗물이 흘러내릴 때, 통닭집에는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준 y축에 따른 부의 차등의 모티프가 여기에도 있다. 기생충의 주인공 가족처럼 밑으로 흘러 내리는 부에 기생하려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은 그 은총 같은 부의 단편들을 조금이라도 갖고자 언덕을 오른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녀가 그 집에서 정말 가만히 앉아있는지, 경찰의 말마따나 요가를 가르치는지 알 수 없지만 계절에도 불구하고 시스루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성을 저녁에 불러들이는 대가로 매월 350을 받는다는 사실은 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후에 승객이 되는 남자는 더욱 직설적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병들과 솜, 주사바늘을 들고 그 집에 출입한다.



  “누가 그랬어요. 눈은 비랑 다르다고. 모두에게 공평하다고요.”

  그녀의 말이다. 정말 그럴까? 밑으로 흘러내리는 재산이나 비와 다르게 눈은 공평할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덕 위 저택에 사는 노부부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결코 언덕 아래로 나가는 일이 없다. 결국 눈은 간절하게 저택에 출입해야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 뿐이다. 눈 내리는 날 시간에 늦을까봐 초조함을 삼키는 이들은 결국 밑에 사는 이들이다.

  공평한 듯 보이지만 가진 이와 못 가진 이를 정확하게 구분한다는 점에서 눈은 공권력과 닮았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나’와 경찰 사이에서 김승민과 요가강사 장신영으로 갈릴 때, 노부부의 증언이 거짓말이라는 나에게 경찰은 말한다.

  “그 사람들이 뭐 하러 거짓말을 합니까?”

  이 말에는 거대한 폭력이 숨어있다.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이유란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부와 재력, 배경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른 가능성을 일축시킨다.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의심하고 파헤칠 의무를 가지는 공권력은 관심이 없으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텍스트 전체에 혐오가 난무한다. 실상 서로가 서로를 혐오한다. 소설은 그 혐오, 즉 '시선을 통한 객체화'의 시작지점이 어디며 어디서부터 평가해야하는지 묻는 듯하다. ‘나’는 짐짓 무고한 사회적 약자로 보이나 ‘나’는 자신의 폭력적인 시선으로 승객들을 캔버스에 박아 넣고 객체화·대상화한다. 또한 청학동 언덕으로 사람들을 운반하는 일을 (장거리 콜을 받기 위해서) 충실히 수행한다. 청학동을 출입하는 이들은 혐오스러운가? 김승민은 자신이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녀가 그 저택에서 한다는 일, 그녀의 절도행위, 청학동을 오르는 남자의 통에서 떨어진 병과 주삿바늘들은 혐오스러운가. 김승민이 혐오스럽지 않다면 그 남자는 혐오스러운가? 그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재산가들은 떳떳한가? 자신의 집에선 항상 무언가 더 챙겨갈 수 있다며 오만원을 건네는 노부인의 자부심은 또 어떠한가. 혐오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실종된 그녀를 찾는 경찰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를 잃어버린다. 노부부의 집에서 시선을 받으며 앉아있는 대가로 월 350을 받는 김승민과 요가강사 장신영이 혼재된다. ‘나’가 염탐하던 SNS는 정말 그녀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쉽게 대중들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이것이 혐오의 본질이다. 혐오란 시선을 통해 스스로에겐 주체였을 타인을 객체로 끌어내리며 발생한다. 그것은 ‘나’의 왜소한 신체를 보는 행인과 손님들의 시선에서, 그녀를 비롯하여 언덕을 오르는 이들을 평가하는 ‘나’의 태도에서,  승객들의 크로키를 그리고 동물을 박아놓음으로써, SNS와 뉴스, 거리, 세상 어디든 사람이 사람을 보며 발생한다. 특히나 ‘나’가 김승민이 하는 일을 혐오함은 명백하다. 나는 그녀를 스케치하며 동공을 부엉이의 눈으로 대체했다. 그녀가 자신이 하는 일과 처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길 바라랐기 때문이다. '나'에게 감히 김승민의 삶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또한 그녀가 당했다는 염산 테러 사건은 (더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구태여 하지 않겠지만)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이 당하는 폭력의 일종이자 상징이다.


  이 지점에서 혐오의 정의를 짚어야겠다. 혐오란 단순하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혐오의 사회적인 정의란 시선을 통해 객체화당하는 것, 즉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당하고, 넘겨짚어지고, 멋대로 응원 받고 야유당하고 동정의 대상인 동시에 멸시와 측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대중적인 인식대로 욕먹고 매도당하는 것만이 혐오가 아니라 프레임 씌우기나 역할 고정도 혐오이기에 칭찬이나 응원도 혐오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손쉽게 사회·문화적인 약자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사실상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나’의 장애는 고정적인 것으로 목격되는 신체의 특성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장기간 불변하는 혐오의 대상이다. 직접적인 혐오 앞에 ‘나’는 오히려 그것들을 잘 식별할 수 있다. 반면 그녀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계기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것들이기에(처지, 일거리, 젠더 등등) 그녀에게 가해지는 혐오란 일상적으로 깔려있으며, 그것들이 날카롭게 작동하는 계기는 휘발적으로 작동했다가 다시 일반적인 것으로 위장한다. 때문에 그녀는 채득된 자신의 일부분으로 혐오를 받아들여 쉽게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나 그녀에게 달리는 혐오는 대중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복수의 이름(김승민, 장신영)을 취한다. 그러나 언제든 손쉽게 점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염산을 맞았음에도 김승민인이 장신영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보자면, ‘나’의 태도는 이중적인 동시에 얼마나 가소로우며 가당찮은가. 혐오를 당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또한 혐오란 그렇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이 그림들에는 문제가 있어요. (…) 동물과 사람을 붙였잖아요. 근데 너무 매끈해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그래서요?”
  “어딘가 좀……아녜요. 신경 쓰지 말아요.”

  예술가로서 ‘나’의 시선은 타인의 신체에서 결핍을 찾아 그 자리에 동물의 신체를 집어넣는다. '나'가 혐오한 자리에 동물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혐오의 지점들은 결코 매끈하고 자연스럽지 않다. 처음부터 혐오와 하나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후천적으로 타인에 의해 씌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매끄럽다고 믿는 듯하다. '나'가 가진 장애는 (비록 지니고 태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몸에 새겨진 것으로, 더 이상 '나'와 구분될 수 없는 특질이다. 그런 '나'가 혐오를 처음부터 그 주인과 하나인, 매끈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면 '나'가 혐오의 대상으로 삼은 그녀의 굽은 목과 어깨 비대칭, (부엉이로 대체당하는) 눈, 그리고 그녀의 직업 등은 사회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목과 어깨, 생기없이 죽은 눈 등은 사회에 몸 담고 살아가며 굽고 뒤틀리고 죽은 것이며 안타까운 처지와 종사하는 일 등은 일시적인 그녀의 상태에 가깝다. 따라서 그녀에게 있어서 혐오란, 처음부터 하나인 매끄러운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씌워지고 입혀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림에 대한 불편한 언급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부터 사회가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고 광기와 장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격리하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혐오의 시선은 문화의 경향에 의해 자라나는 것이다. 처음부터 혐오하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는 없기에, 모든 혐오는 인간과 동물의 신체가 매끄럽지 않게 붙어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그녀는 ‘나’를 감히 넘겨짚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 혐오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서도 혐오를 자행하는 ‘나’의 이중성을 꿰뚫어본 것이 된다.

  결국 혐오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기에 발생한다.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들과 단편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의지할 때 ‘나’의 시선은 혐오적인 것이 된다. ‘나’는 그녀의 인생 전반을 아는가? ‘나’는 언덕을 끝까지 걸어 올라가본 적 있는가? 노부인의 집에 들어가 본 적 있는가. 택시좌석에 앉아 승객들을 언덕으로 나르고 담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돌아가는데 그치는 한, ‘나’에게 다른 여지는 없다.


  뜻밖에도 ‘나’는 마지막 행동에서 희망을 보인다. 그 집 담벼락을 오르는 행위는 알려는 행위, 멋대로 객체화하는 시선을 거두고 손을 내밀어보는 행위로 귀결된다. 그 끝에 무엇을 보거나 마주할지 모르지만, 담을 기어올라 무단 침입하는 ‘나’의 모습은 백미러를 통해 승객들을 힐긋대며 스케치를 하는 모습보다 훨씬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러운 것. 투쟁은 그 작은 역동에서 시작한다. 누군가는 장애를 가진 몸으로 자산가의 가택을 기어올라 평화를 깨려는 모습더러 혐오스럽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고 가는 이들과 거주하는 이에 의해 혐오의 본산이 된 그곳에 침입하려는 행위, 한번 들여다보려는 행위, 안정을 깨는 행위, 위법적이며 논란의 여지가 만연한 행위야말로 전복을 꽤한다. 전복과 반란들은 필연적으로 지배적인 경향과 시선들에 의해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그런 것들의 약동으로 인해 사회는 붕괴와 재생을 반복하며 마침내 변화한다. ‘나’가 수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불편하고 아름답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못하더라도, 그 행위의 힘은 바로 그러한 특성에서 기인한다.

  ‘나’가 그리던 작품들이 자신의 결함과 결핍을 타인에게 투영하여 채워 넣는, 도착증적인 만족감을 유발하는 불쾌한 골짜기에 머물렀다면, 신체 비율이 이상한 사람이 담을 넘는 모습은 전복을 꽤하는 유희가 되며 따라서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위협적이다. ‘나’가 저택 담벼락에 그려 보이는 크로키는 더는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혐오의 이름으로 칠해질 것이다. 불쾌할 뿐이었던 골짜기는 불편함을 에너지 삼아 유동하는 골짜기로 다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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