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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17. 2024

이상한 구조의 구조주의와 방정식의 오이디푸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리뷰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특이하게도 과학자들을 다루는데, 큰 전개는 실제 과학사를 따라가며 중간의 공백들을 픽션으로 채워넣었다. 그럼에도 소설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현대 과학사가 그만큼 기묘하기도 하며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역량도 보이는 부분이다. 

  소설을 읽지 않아도, 과학사를 잘 몰라도 읽을 수 있게끔 쓴다고 노력을 하였다. 잘 몰라도 읽기를 시도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소설에서 발췌해온 인용 문장들의 페이지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문학동네, 2022년 6월 7일> 의 페이지 표기를 따랐다.


  나는 과학에 작은 관심이 있을 뿐이고 특히나 물리학에 학문적인 전문성은 한 톨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극미량의 배경지식에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현실과 허구를 알쏭달쏭하게 섞어놓은 이야기를 따라갔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 적힌 이론이 사실과 다를 수 있으며, 서술된 과학자의 삶은 현실과 다를 것이다.

  리뷰 1부에 해당하는 '이상한 구조의 구조주의'는 단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만을 , 리뷰 2부에 해당하는 '방정식의 오이디푸스'는 앞의 단편을 포함하여 단편집「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 수록된 「프러시안 블루」,「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밤의 정원사」를 모두 다룬다.





이상한 구조의 구조주의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듯하다. (…) 내가 보여주는 세상은 당신이 나를 적용하면서 생각하는 세상과 같지 않다고."

                                                -오펜하이머가 슈뢰딩거의 파동함수, p. 221



  물리학은 어렵고 양자역학은 이상하다. 두 형용사의 차이는 뭘까? 어렵다는 건 복잡하지만 규칙 안에는 있다는 뜻이고, 이상하다는 건 애초부터 규칙 바깥에 있으니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다.

  소설에서 보여주듯 양자역학을 둘러싼 물리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한편에는 양자역학의 '이상함'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시 정돈된 법칙으로 저술하려는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드 브로이가 있다. 그들은 괴상한 양자역학에도 분명히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양자역학에 적용시킬 공식을 찾아 헤맨다. 상식적인 법칙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기존 사고방식을 억지로 끼워넣었기에, 그렇게 완성된 공식은 어딘가 비어있고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파동 역학의 파동 함수처럼)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 역시 신의 뜻이어서 우연인 것처럼 보일 뿐 법칙의 일부이며 언젠가 해명되리라고 굳게 믿는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포함한 모든 이론을 통합하여 질서를 세우려는 시도(대통일 이론)를 하였으나 완성시키지 못했다.

  "신은 우주를 놓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소!
-알버트 아인슈타인, p.227

  한편에는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우주의 '이상함'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하이젠베르크, 보어가 있다. 그들은 물리학으로 세상 전부를 담을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기를 든다. 그들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미시 세계로 진입하면 기존 상식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며, 전자의 움직임은 순전히 변덕스러운 우연에 따른다. 그러나 이 혼란이 현실이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마저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오류나 빈틈을 찾아내지 못한다.

  "신에게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보어, p.22


  모든 자연과학이 그렇듯이, 물리학의 목적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만물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예측하면 도래할 미래까지 알게 되리라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희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주는 정해진 법칙에 따라 흐르는, 안정되고 정돈된 공간처럼 보였다. 중력을 발견한 뉴턴에서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까지 물리학은 숫자로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는 포부 아래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심지어 상대성이론은 중력에 의한 시간과 공간의 휘어짐마저 질서 아래 정렬시켰다. 더 이상 우주에 두려울 것이 있을까?

  그러나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코펜하겐 해석이 그 믿음에 균열을 냈다. 전자는 눈으로 보기 전까진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으며 관측하는 순간에야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된다. 법칙은 무용지물이며, 오직 우연과 확률 뿐이다.

  저자는 학자들이 양자역학을 두고 벌이는 광기에 가까운 고뇌를 보여준다. 절대 눈으로 담을 수 없는 작은 세상의 질서를 고민하는데 미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끝에 다가온 깨달음과 연구 성과를 두고 벌어지는 과학자들 사이의 갑론을박,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는 솔베이 회의까지. 양자역학에 대한 시각을 두고 지구 최고 지성들의 감정이 미친듯이 날뛰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론물리학의 위상을 알아야만 한다. 물리학은 학문인 동시에 우주를 말하는 언어이자 세상에 대한 신념이었다. 중력이 알 수 없는 미스테리가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자 질서이며, 그 움직임을 서술할 수 있는 공식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리학에 따르면 구조는 반드시 존재하며, 다만 포착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렇기에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물리학은 철학과 구분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삼라만상을 해석하는 인간의 태도이자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고전 물리학자들은 '구조주의자'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구조주의는 우리의 생각과 인식, 사회와 문화가 이미 무의식적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그 구조를 밝혀내고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이면의 '무의식'이라는 것의 영향으로 작동한다는 구조를 주장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사회의 모든 구성과 토대가 자본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리학은 우주의 모든 것이 질서와 법칙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하며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아인슈타인에게 코펜하겐 해석이 말하는 우연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계산을 다시 해야하는 귀찮은 작업이나 젊은 물리학자들에게 자신의 이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치욕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선두에 서서 밝혀온 질서정연하게 빛나는 세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신념의 문제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극단적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리학이 객관적 세계에 대해 그만 말해야 한다는 것은 관점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의 정신 자체에 대한 배신이었다. (⋯) 자연법칙이라는 관념을 버리고서 우연을 왕자에 앉힐 수는 없었다.
-p.225~226

  그러나 고전물리학이라는 색안경을 벗어야만 양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이론들은 이상하고 난해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으로서는 분명한 참이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무신경한 박탈자나 악의에 찬 훼방꾼이 아니며 단지 학자로서의 소임에 충실한 것이다. 고전적인 견지에서 해석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떠나 새로운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다.

  그는 슈뢰딩거의 재주가 아무리 모든 사람을 매혹시켰더라도 이것이 막힌 길임을, 참된 이해로부터 멀어지는 막다른 골목임을 알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 p.201


  근본적으로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과연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구조를 파괴한 것인가? 구조가 이상하다고 해서 구조가 아닌 것인가? 딱 맞아 떨어지는 이치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소망에 불과하며 우주는 그것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의 사고방식을 따라가 궁극적 결과에 도달하면 어둠이 물리학의 영혼에 스며들 것임을 직감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승리하면 마치 우연이 물질의 심장부에 깃들어 가장 근본적인 성분들과 떼려야 뗄 수 없이 묶인 듯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의 기본적 성격이 영영 모호하게 남을 터였다. 누군가 그를 막아야 했다.
-p.143

  그러나 어둠이 물리학의 영혼에 스며들면 어떠한가? 물리학은 근본적으로 빛이 아니다. 그저 자연 세계의 운동과 상호작용을 연구할 뿐이며, 그것이 어둠이면 어둠을, 빛이면 빛을 다룰 뿐이다. 누군가 그를 막아야 할까? 그렇다면 하이젠베르크의 이론과 반대되면서도 더 참에 가까운 이론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학문적 견해는 '막아야 한다'는 등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지를 원동력 삼을 수 없다.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세계에는 장난질치는 것 같은 웃기는 구조가 존재할 뿐이고 코펜하겐 해석은 그것을 밝혔을 뿐이다. 즉 그것마저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한 구조의 구조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것이 아니다. 세상이 이해하기 힘들고 이상한 존재라는 것임을 이해한 것 뿐이다. 질서에 과하게 목 매는 우리 인간에게, 우리 인식 수준에서의 이해가 정지하는 공간의 발견은 어쩌면 기뻐할 일이 아닐까? '마침내 계산기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 도달했도다.' 때로는 세상에 이상한 것들이 존재할 뿐이다. 당장 우리 개개인들은 일상 속에서도 종종 논리적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렇지만 계산해낼 수 없다고 해서 우리 생애 전체를 삶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삶이란 것이 원체 '이상한 구조'라고 받아들일 뿐이다.

  놀랍게도 인류는 아주 오래전 고대 그리스 때부터 우연이라는 이치를 깨우쳤다. 지금으로선 법칙의 수호자인 신은 그들에겐 종종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이들로 그려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합리와 장난질 같은 운명이 인간을 쥐고 흔드는 것을 무대에서 재현하였고, 이를 감상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감탄하고 탄식하며 감정을 해소했다. 또한 이를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인간적인 행동의 모방이자 반복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비극'이다.




방정식의 오이디푸스



"이 어마어마한 지옥이 당신들 탓이 아니라면 누구 탓이겠습니까? (…) 이 모든 광기는 어디서 시작됐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

                                                -술집의 광인이 하이젠베르크에게, p.211



  비극엔 운명의 장난과 아이러니와 탄식이 깃들어 있다. 인간이 제뜻대로 발버둥쳐도 운명이라는 큰 강의 물방울일 뿐이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라이오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 라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애쓰다가 그것을 성사시키며,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를 찾으며 그 진범인 스스로의 목을 조른다. 비극은 변덕스러운 운명과 세계를 무대 위에서 재현함으로써 세상의 불합리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도로 읽힌다. 아직 인간이 땅에 발을 붙이고 밤하늘을 관찰하던 시절, 비극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세계와 운명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을 향한 고찰인 동시에 위로였다.

  비극이 유행한 5세기에서 지금까지 인류 문명엔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이제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고 조율자이자 탐험가이며 계산자이다. 슈바르츠 실트는 서재에 앉아 직접 관측하지 않고도 중력의 특이점과 그로 인한 블랙홀을 예언했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석학들(하버, 슈바르츠실트, 모치즈키, 그로텐디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드 브로이, 바흐, 아인슈타인 등)은 인간의 지성이 도달한 경지를 보여준다.

  "가장 작은 아이조차 손가락 하나로 태양을 가릴 수 있다니 우주는 얼마나 신기하고 광학과 원근법의 법칙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p.55

  그러나 그들의 삶은 세계의 탐구자이자 측량자로서 낭만적이거나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지 않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물론이고 그들 스스로도 모순과 불합리와 고통과 비극을 초래하고 불러오며 심지어 요청한다. 인류라는 종은 그들이 몸 담은 세계를 게걸스럽게 파고들어 지식을 얻어내고 있지만, 인간 개개인은 여전히 본인이 쓴 적 없는 각본에 휘둘리는 운명의 장난감들에 불과하다. 소설은 다양한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이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하버는 자신의 활약으로 탄생한 살충제를 가지고서 나치가 몇년 뒤 자신의 이복 여동생, 매부, 조카들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할 것임은 알지 못했다.
「프러시안 블루」p.34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블랙홀의)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조국(후에 나치독일이 되는 독일 제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p.71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산산조각낸 원자들을 분열시킨 것은 장군의 번들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한 줌의 방정식으로 무장한 과학자 집단이었습니다."
그로텐디크는 자신의 개념들이 세상에 피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했다. (…) 인류가 심장의 심장에 도달하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까?
「심장의 심장」p.97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이 수식들을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밤의 정원사 」p.252

  그토록 뛰어난 석학들마저 신이 짜놓은 운명의 거미줄에 걸려 농락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뛰어난 지성이다. 지식을 향한 갈망이나 개인적인 욕망으로 인해 천치같은 짓을 하기도 한다. 슈바르츠실트는 추운 밤 산행 중 수열을 계산한다고 자꾸만 장갑을 벗어 심각한 동상을 입었으며 슈뢰딩거는 요양원 원장의 딸을 향한 부적절한 욕망으로 몸부림친다. 세상의 비밀을 파고드는 위대한 이들도 결국은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하다.


  현재의 우리가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비극을 대중매체로 향유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비극이 세상과 그것을 둘러싼 우리의 사고를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전처럼 인간의 가녀린 생을 두고 장난을 치고 불합리를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인간도 더 이상 영웅이 아니기에 비극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와 오이디푸스는 죽었다. 그 영웅들은 직접 신들 혹은 세계와 갈등했지만, 이제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비극의 자리를 대체한 문학은 소외당하고 분열 중인 작은 개인들을 비춘다.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닿지 않는 어딘가의 저편으로 쫓겨났으며, 개인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거대하며 대적 불가능한 운명이나 세계가 아니다. 인간이 이룩한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크고 작은 이념, 신념 등과 연약한 개별 인간의 정신일 뿐이다. 우주는 질서정연하며 숫자와 공식으로 설명 가능하고 변수와 혼돈을 만드는 것은 인간 뿐이다. 수학과 과학이 건재하는 한, 비극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양자역학의 발전이 모든 것을 돌려놓았다. 현대전에서 총동원된 인류의 기술력은 인간을 위한 지식 추구가 인간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것을 보여주었다. 생은 너무도 쉽게 끊어진다. 무기를 개발한 과학자 본인과 친지들에게도 말이다. 죽음이 낭자한 세계 정세를 아이러니가 감싸고 있다. 그렇다, 비극의 아이러니가 돌아온 것이다.

  분명 양자역학은 눈부신 성과이다. 3000년에 불과한 인류가 137억년 우주의 비밀에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끝에서 발견한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질서들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 파헤치면 그곳엔 아무런 질서도 없다는 것이다. 그곳엔 우연만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1차, 2차 세계 대전은 총받이로 전장에 나간 군인들은 물론이고 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선사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밝혀낸 세상의 비밀들은 인류가 누굴 죽이는데 그것들을 써먹기로 활용한 이상, 잔혹하고 효율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뉴턴의 옛 물리학이라는 옛 사고방식을 깨부순 아인슈타인은 후에 양자역학의 우연성을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언급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훌륭한 예시가 되었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양자역학의 미시세계를 둘러싼 논쟁은 후에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거대한 화두가 되었다. 원자폭탄 개발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나치와 연합국은 서로 조금이라도 빨리 이 흉악한 무기를 만들어, 그들이 주장하기로는 '억제력'을 쥐려고 애썼다. 인류는 우주를 너무도 궁금해한 탓에 스스로를 멸망시킬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오이디푸스와 오디세우스와 안티고네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잔인하고 무심한 운명의 장난들처럼 말이다.

  이성적 사고의 도래로 비극의 세계 인식을 벗어난 인류는,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까지 도달한 끝에 다시 비극으로 회귀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보듯이,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삶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비극과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배경과도 결부되어있다. 중력을 발견하고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던 시절엔 비극에게 틈이 없었다. 이제 과학자들은 시공간으로 구부리고 꺼뜨리는 블랙홀을 예상하고 연구하며, 양자에 대한 탐구끝에 세상은 우연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문적 호기심 끝에 탄생한 폭탄이 인간의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은 악랄하고 짙은 무작위성의 주사위놀이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이디푸스는 돌아왔다. 그의 재림은 놀랍게도 세계의 비밀을 파헤친 끝에, 치밀한 관측과 숫자와 방정식을 들춰낸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21세기에 다시금 무기력해진 인간이 마주한 것은 다름아닌 '방정식의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그들은 단 한번도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춘 적이 없다. 오이디푸스는 한 순간도 세상과 투쟁하지 않은 척 없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한다. 있는대로 농락당하고는 버려진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스스로를 추방시킨다. 하버는 인공비료를 만들어 세계를 풍족하게 하는 한편 각종 폭약과 독가스의 개발에도 이바지했으며, 선구자였던 아인슈타인은 훗날 코펜하겐 해석의 지지자들로부터 조롱당한다. 세상의 비밀을 또 하나 밝혀냈을 뿐인 핵분열 현상은 핵폭탄의 방아쇠가 되었고 지금도 인류는 끝없이 스스로 자해를 하고 있다. 비극과 아이러니가 낭자하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여전히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의 극의에 도달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성질이 그렇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산책로의 가게들은 대규모 폭격으로 탄화된 잔재처럼 보였다. 낯선 사람들이 주위에 우글거렸는데, 그들의 살갗은 하이젠베르크에게만 보이는 불에 새카맣게 타버렸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갈래머리에 불이 붙은 채 뛰어다녔으며 커플들은 팔짱을 끼고 화장터에서처럼 함께 불타며 웃음을 터뜨렸다. 불꽃은 그들의 몸을 핥고서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p.130~131

  비관적인 것은, 그토록 미숙하고 어리석으며 돌풍 같은 운명에 흔들려 악수만 두기 일쑤인 우리에게 이제는 신과 같은 힘이 쥐어져있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처럼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의 환영을 본다. 어쩌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고의로 개발을 지연시켰다고 말하나, 어찌됐건 그는 나치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우란프로옉트'의 참여자였다. 그에 따라 연합국에서도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뇌만 큰 머저리들인 인류는 (전쟁으로도 모자라서) 계속해서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 아이러니의 끝에 벌어지는 일은 더 이상 비극적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건(오이디푸스의 추방 등)이 아니라, 종족의 멸망일지도 모른다.


  그는 명성, 창의력, 영향력이 정점에 이른 1970년 고등과학연구소가 프랑스 국방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사직서를 냈다.
  그런 뒤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끊고 동료와 의절하고 세상으로부터 달아났다.
「심장의 심장」P.97

  희망은 그로텐디크, 오펜하어머와「 밤의 정원」의 정원사에서 엿볼 수 있다. 그로텐디크는 인류가 저지르는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폭력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연구물들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게 하려고 총력을 다했다. 소설에서 언급되진 않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완성한 폭탄의 위련을 보고 "과학자라는 죄를 알아버렸다."라고 말했으며 반핵주의자가 되어 활동했다. 밤의 정원사는 세심하게도 식물도 잠드는 밤에 정원일을 한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위대한 과학자였는지 그저 연구자였는지 혹은 물리학이나 수학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평범한 사람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가 이웃의 정원까지 돌보고 다니는 이유는 양자역학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20년 안에 우리는 인간성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 우리의 정신은 양자역학의 역설과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양자역학은 마치 다른 행성에서 지구로 떨어진 이론 같아서 우리는 유인원처럼 그 주위를 뛰어다니고 만지작거리고 노리개로 쓸 뿐 결코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이런 연유로 그는 지금 정원을 가꾸고 있으며 자신의 정원 뿐 아니라 마을의 다른 정원들도 돌본다.「밤의 정원사 」p.252~253

  인류는 한 손엔 생명을, 한 손엔 죽음을 쥐고 있는 변덕쟁이이다. 숲을 가꾸고 자연을 보호하는 한편, 나무 사이에 퍼지는 역병을 막기 위해 불로 태우거나 동네를 돌아다니는 개들을 (의도든 아니든) 독살시킨다. 소설의 개들이 죽은 것이 악의에 의해서든 실수이든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마찬기지로 악의 없는 연구, 순수하게 지적인 호기심이란 이제 존재할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과학적 호기심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고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로텐디크의 단순한 질문인 "미터란 무엇인가?"에 슈넵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처럼, 인류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주변적인 것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의 특성을 취하고 활용할 뿐이다.

그런 다음 열매가 한꺼번에 익고 이 초과 중량 때문에 모든 가지가 부러져 몇 주 뒤에는 썩어가는 레몬이 땅을 뒤덮는다. 죽음을 앞둔 저런 풍요는 야릇한 광경이라고 그는 말했다. (…) 하지만 나무는 사뭇 다른 생명체이며 이런 과숙의 과시는 식물보다는 인류의 마구잡이식 파괴적 성장과 더 가까워 보인다. 내 레몬나무를 얼마나 살려두어야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베어서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밤의 정원사 」p.254

  그러나 알고 있는가, 자연이라고 언제나 평화의 수호자이자 조용하고 점잖은 샌님이 아니다. 인류만이 혼자 명료한 정답을 찾아 헤맸을 뿐 우주는 원래 혼탁하고 어지로운 곳이다. 이상한 구조도 구조이다. 지식을 갈구하는 것을 참거나 막을 수 없으므로, 이상한 구조에 대한 과학철학적인 입장에서의 고찰과 자기반성이 앞으로는 더더욱 간절하고 필수적일 것이다. 밤의 정원사는 나무가 받는 고통을 덜기 위해 밤까지 기다려 작업을 한다. '나'는 썩어가는 열매로 난장판을 만들기 전에 언제 레몬을 베어야 할 지 묻는다. 그는 베어서 속을 봐야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효율을 추구하고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지극히 인간의 입장일 뿐이다. 일제히 맺었다가 일제히 죽는, 거대한 자연의 절대적이고 야릇한 힘을 보지 않겠단 말인가? 정말이지,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이제 세계는 우연이 지배하는 불합리의 본산이 되었다. 양자역학의 입장에서 우리는,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하늘에 떠있는 커다란 달마저도 저기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비극적이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행한 운명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손 놓고 살아가지 않을 것인가? 결과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밤하늘엔 떡하니 달이 떠있다. 확률적으로 그것이 다른 곳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주어질 뿐이다. 구조가 이상하다고 해서 모든 학문이 정지할 것인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것인가? 정말이지,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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