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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29. 2024

우리가 행복한 이유

「내가 행복한 이유」리뷰, SF 장르에 대한 고찰



  SF에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그것을 읽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 기계, 기술이 우리 삶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형태와 타인과 관계 맺는 형태를 바꿔놓았고 심지어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해주기도 한다. 소설이 일상을 포착하는 매체라고 할 때, SF는 사실 그러한 포착을 가장 세밀한 단위에서 수행한다. 적어도 고도화된 21세기에는 그렇다. 우리는 10초라도 기술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무력감에 빠지지 않는가. 가령,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은 기술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이제는 사람의 작은 일부와도 같은 (혹은 큰 일부, 혹은 전부와도 같은) 스마트폰이 갑자기 먹통이 되거나,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등이 사라지거나 그 형태가 변화하면 우리의 인간관계도 맞추어 변화할 것이다. SF의 역할은 허황된 애기를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SF 장르는 기술을 조명하여, 그것들을 극대화하거나 극소화하거나 변화시켜 그것과 밀첩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렉 이건'의 SF 단편집 「내가 행복한 이유」에 수록된 작품들 중「내가 행복한 이유」를 리뷰 대상으로 삼은 것은 특히나 이 작품이 SF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크는 뇌종양 제거 수술의 부작용으로 쾌를 느끼는 뉴런이 전부 죽어버렸다. 그의 회색빛 비참한 삶은 뇌의 회로를 복구하는 수술로 희망을 얻는다. 4000명의 뉴런 데이터를 통해 만들어진 '의뇌'를 삽입함으로써 마크는 다시 쾌를 느낀다. 그러나 끝내 뇌 속에 든 4000명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호불호를 구축하는 것에 실패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쾌만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쾌의 수치를 조절하는 기기의 도움으로 삶을 다시 시작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마크의 회복과정을 통해 쾌감이란 무엇인지 역설한 점이다. 그가 쾌를 잃은 것과 다시 되찾은 것은 어떤 정신적인 충격 따위가 아니다. 뇌의 뉴런과 관계된 병리학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아를 갖고 세상을 감각하며 사고하는 과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신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느낄 수는 당연히 없다. 자아란 극도로 추상적이면서도 분명히 현존하는, 애매하고 특이한 상태로 유지된다. 우리 모두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사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판단 내리는 모든 과정이 화학적인 과정에 의한 작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갑자기 일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마찬가지로 보고 느끼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렉 이건의 작업은 그런 평온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고는 영적이고 추상적인 활동이 아니기에, 그 화학작용에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동작하지 못한다. 마크처럼 아무런 쾌도 느끼지 못하거나, 모든 것들에서 쾌를 느끼게 될 수 있다. 소설은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주체가 겪는 일을 보여준다. 당연히 나의 것이었던 호불호의 판단, 정상적인 사고를 빼았겼을 때 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주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화학물질의 노예인 것이 아닌가?

  마크는 직접 쾌의 정도를 수치로 조절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아의 재활활동'을 수행한다. 내가 무엇에 얼마나 쾌를 느낄 것인지 직접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에 대한 인위적인 개입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고뇌에 휩싸기에 만든다. 내 머릿속에 4000명의 쾌에 대한 정보가 쌓여 나의 쾌를 만든다면, 나는 나인가? 내 의지에 따라 무엇에 쾌하고 무엇에 불쾌한지 정해나간다면, 나는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어디로 가는가. 

  마크는 애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신이 받은 뇌수술에 대해 털어놓는다. 잘 받아들이는 듯 싶었던 애인은 결국 이별을 고한다. 마크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쾌 수치를 건드려서 '그녀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았다'는 식의 생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어차피 감정 제어를 통해 언제든 행복을 불러올 수 있으니 상관없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견디기로 한 것이다. 끝내 마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수천만의 조상들이 내 머릿속에 있다. 4000명 쯤 더한다고 뭐가 대수인가. 원래 삶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조금 직관적으로 의식할 뿐이다.'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긍정한다.

  마크를 규정하는 것은 그의 쾌락 뉴런들에 들어있는 4000명의 데이터나 그에게만 존재하는 감정제어 패널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결정들이다. 쾌 수치만 건드리면 편해질 수 있는 것을, 굳이 선택하지 않아 고통을 겪게 만드는 고집이 마크를 마크로서 존재하게 만든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결국 가치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으로 마크는, 자신 스스로의 쾌가 지극히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의해 도출되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체 자신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마크가 느낀 거대한 허무의 깨진 단편들을 종종 마주한다. 나의 쾌는 내가 속한 집단의 쾌와 종종 일치하지 않으며, 되려 역행하기도 한다. 나의 행동들은 사회와 세계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아무런 의미도 창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호불호에는 무슨 가치가 남아있는 것일까? 그러나 마크가 보여주듯, 나를 나로 규정하는 것은 끝내 나만이 할 수 있다. 기술을 쓰는 것은 인간이다. 그것은 세상을 직관적으로 드러낼 뿐, 허무를 부여하거나 해체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나 자신이다.'




  이처럼 SF 장르가 하는 작업은, 말하자면 주체를 '극한의 SF적인 환경'에 몰아넣어 그 반응을 보는 것이다. 「내가 행복한 이유」의 경우 그 극한은 '허무의 극한'이다. 가장 근본적인 어떤 것마저 과학과 기술의 제어를 받을 때, 허무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SF는 그런 물음을 던진다. SF란 종종 매도당하곤 하는 것처럼, 자기부상자동차와 함께하는 신나는 미래나 외계인의 침략을 다루는 흥미 위주의 알맹이 없는 장르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수단을 통해 인간 존재의 현주소를 묻는다. 지금 SF가 과거보다 가치있는 것은 과학이 발전한 만큼 SF가 제시하는 상황이 아주 허황된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머지않아 도래할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주체들은 이미 위협받고 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허무, 분열이 과학기술과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그 자체로 SF 소설처럼 보인다. 인류와 과학기술은 이미 충돌하는 중이고, SF라는 에어백은 작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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