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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휴그리미
Apr 09. 2024
오리의 의리
수필
언제부터인가 드라마 삼매경이 되어버렸다.
주인공의 감정대로 울고 웃고 하는 것이 다반사고 방송 시간이 되면
쏜살같이 TV 앞을 지킨다.
완벽하고 정의로운 성격에 뭐든 척척 고치고 턱걸이를 80개씩 하는 남자..
바로 우리 아빠의 얘기다.
아빠는 귀가 유달리 예민하셨고 퇴근 후엔 항상 면봉으로 귀를 청소하셨다.
‘어 왜 맨날 귀를 후비시지? 우리에겐 절대로 귀를 후비지 말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아빠는 어릴 때부터 한쪽 귀에 고름이 나오는 심한 중이염이 있으셨다.
이명현상으로 남몰래 힘겨워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커서야 알았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좋다는 약, 좋다는 베개를 다 써보았지만
중이염은 평생 아빠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새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다. 저놈의 닭이 꼬끼오 울어대서 잠을 설쳤다.
저 오리 새끼는 허구 헛 날 꽥꽥거리니
귀가 따갑다."
불평을 늘어놓으시는 아빠를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동물을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튼실한 닭으로 만들어 놓으셨으니 말이다.
우리 4남매는 그때 “닭 대가리”라는 말이 왜 있는지 온몸으로 경험했고
정성껏 쪼아대는
닭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닭의 눈엔 우리 식구가 자기 구역을 침범하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식구들은 닭을 잡아먹어 버리자고 아우성을 쳤다. 그때마다 할머니만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으셨다.
시도 때도 없이 목청껏 울던 닭이 완전히 아빠의 눈 밖에 난 것은,
먹이를 주시던 할머니 손등을 피가 날 정도로 찍은 후부터다.
그래도 할머니는 키운 정이 드셨는지 닭을 잡지 않으셨고 여전히 애지중지하셨다.
그러던 할머니가 닭을 잡았다.
닭 소리에 잠을 설치는 아빠를 위해 마음을 다잡으신 것 같았다. 정확히는 닭집에 갖다 주었다.
우리를 쪼기 위해 매일 열심히 달린 탓에 몸짱이 된 닭을 보고 닭집 주인이 작은 닭 세 마리와 바꿔주었다.
저녁상에 일곱 식구가 먹기에도 푸짐한 백숙이 올라왔다.
나는 닭이 빨리 없어지길 바랐지만 닭집 주인이 잡아먹었을 닭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백숙에 손이 가지 않았다.
기세등등하게 퍼덕거리던 말썽꾸러기가 자꾸 떠올랐다.
할머니 역시 그날, 그 닭을 전혀 입에 대지 않으셨다.
정을 주어 키우던 닭이 없어지자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지셨다.
두둥~~~
오리의 등장은 이 때문이었다. 워낙 효자셨던 아빠가 할머니의 우울한 표정을 읽으시고 엄마에게
오리를 사 오라고 하셨다.
“어메, 오리는 닭보다 몸에 좋으니 잘 키워서
잡아먹읍시데이.”
노란 새끼오리는 큰 양동이에 담긴 물 위에서 물갈퀴를 바쁘게 움직이며
잘 놀았다.
4남매는 뙤약볕도 마다하지 않고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채 쪼그리고 앉아 쫑알거렸다.
“아유 예뻐라. 귀여워. 닭보다 훨씬 낫네.”
행복도 잠시...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랐고 훨씬 빨리 컸다.
공포도 2배였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빛의 속도로 뛰어야 오리의 공격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오리가 크자 아빠의 불평은 다시 시작됐다.
“저놈의 오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
“꽥꽥 꽤액꽥” 오리의 울음소리는 닭 버금가게 우렁찼다.
아빠는 애꿎은 할머니에게 원망의 소리를 하셨다.
“어메, 어메가 너무 잘 먹여서 오리가 더 꽥꽥거리는 아녀?”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아빠는 자전거 뒤 상자에 오리를 담아 줄로 단단히 고정시키고 계셨다.
“아빠, 오리도 닭집에 갖다 주시려는 거죠?”
“아냐.”
그리곤 오리와 함께 훌쩍 나가버리셨다.
저녁이 다 되도록 오시지 않자 식구들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아빠가 들어오셨다.
자전거 뒤에 오리를 태운 채였다. “엥, 오리 안 갖다 준거예요?” “어디 갔다 이제 오신 거예요?”
식구들의 질문에 아빠는 멋쩍게 웃으시며 “바람 쐬고 왔어.”라고 하셨다.
제일 걱정하셨던 엄마도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셨다.
“오리랑 데이트라도 했다는 거예요?”
묵묵부답인 아빠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채 더 이상 추궁하진 않았는데 며칠 후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2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찾아가셨다.
너무 시끄러워 데리고 있긴 힘들고 닭집에 갖다 주면 오리가 살 수 없을 테니 풀어 주려 한 것이다.
산과 물이 있는 냇가에서 오리는 물 찬 제비처럼 잘 놀고 무척 좋아했단다.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빠 혼자 뒤돌아 오는데
오리가 갑자기 꽥꽥거리며 번개같이 쫓아왔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여기며 다시 냇가에 데려다주고 지켜보다 뒤돌아서는데
오리는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꽥꽥거리며 죽자 살자 쫓아왔단다.
한두 번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똑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아빠는 안 되겠다 싶어 냅다 줄행랑을 치셨다고 한다.
“꽥꽥(왜 날 버리고 가요? 아빠, 기다려요. 같이 가요.) 꽥꽥”
오리는 포기하지 않고 큰길까지 아빠를 따라 몇 분을, 몇 미터를 달리기 했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시던 아빠의 귀에 “꽥꽥” 소리가 떠나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물갈퀴를 쩍 벌리고 마구 쫓아오는 오리의 모습이 보이더란다.
아빠는 우리에게 오리 얘기를 하시다가 잠시 말씀을 멈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 못 하는 미물일지라도 그 순간, 그 냥 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참다못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오리를 버리러 갈 때 아빠의 마음도
무거우셨다는 것과
돌아오는 내내 흐뭇하셨던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빠에게 보여준 오리의 의리는 사랑 고백처럼 아빠를 미소 짓게 했다.
그날, 오리는 피곤했는지 아빠의 등 뒤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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