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로 들어간 초식동물
세상이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작동한다는 건 이미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알 수 있었다. 소문이나 기세, 혹은 드물게 실제 실력을 바탕으로 암암리에 싸움 순위가 매겨지고, 그에 따라 ‘학교’라는 정글의 왕과 맹수들, 그리고 눈치껏 그 세계를 버텨 나가는 초식동물의 역할이 주어진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위치한 존재, 그러니까 스피룰리나쯤에 해당할 것이다. 나라고 치고받고 싸울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코 싸움을 원했던 적은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어째선지 호전적이지 못한 내 성격을 걱정하셨던 것 같다. “빈이는 싸움 같은 거 싫어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어떤 실망감 같은 게 묻어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싸움을 싫어한다는 게 큰 잘못처럼 느껴졌다. ‘남자라면 싸움도 좀 하고 그래야지, 왜 그걸 겁내?’ 그런 목소리가 이따금 나를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90년대생 아이들(특히 남자) 중 태권도장에 발 한 번 안 디뎌 본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보다 당차고 호전적인 사람으로 아들을 키우고 싶었던 내 어머니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나를 태권도장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는 태권도를 배우고 싶지 않았다. 내 또래 아이들이 ‘악!’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뻗고, 매트를 차고, 공중을 가르고, 바닥을 뒹구는 태권도장의 분위기는 묘하게 위압적이고 두려운 데가 있었다. 그러나 감히 태권도를 배우고 싶지 않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시 느꼈던 마음을 온전히 떠올릴 순 없지만, 아마도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이마저도 겁이 나서 포기한다는 게 내키지 않는 마음이 각각 절반쯤 자리했을 것이다.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시간이 흘러 허리띠의 색깔이 바뀌고, 차 올린 발끝이 더 높은 곳을 겨눌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한 번씩 찾아오는 ‘겨루기’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겨루기가 시작되면 실제 시합처럼 서로의 빈틈을 노려 힘껏 발차기를 꽂아 넣는 대결이 시작된다. 나는 그 시간이 몹시 부담스럽고 무서웠지만, 그렇지 않은 척했다. 맞아도 안 아픈 척, 즐기는 척. 오히려 도중에 수업 시간이 끝나 겨루기가 무산되면 한껏 아쉽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실은 때리는 것도, 맞는 것도 싫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태권도장을 벗어난 이후에도 나는 종종 그곳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환경에 놓였다. 이를테면 남자 고등학교나 군대 같은 곳. 또래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에서는 굳이 서로에게 발차기를 날리지 않아도 하루에도 수차례 심리적 겨루기가 벌어지는 듯했다. 누가 더 강한지를 욕으로, 모멸로, 혐오로, 계급으로, 큰 목소리로, 물리적인 힘으로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부단히 스스로를 구분하려는 한편, 때로는 나도 그들과 비슷한 종류임을 어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들 중 대다수는 그다지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인간 유형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리에서 벗어나 아웃사이더가 될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소꿉장난 같은 ‘남자 놀이’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고 나면 한동안 밀려오는 자기혐오의 물살을 맞으며 비겁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고 난 이후로 얼마간 그런 고민이 많았다. 때로는 위압적이고 화를 낼 줄 아는, 마초적인 카리스마의 소유자만이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혹은 막연히 상상해 본) 촬영 현장은 그런 사람들이 큰 힘을 가지는 곳이기 때문에, 유약하기만 한 내 성향으로는 ‘좋은 감독’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화를 만들며 조금씩 경험을 쌓고, 나를 둘러싼 세상도 바뀌어 가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둘씩 발견해 가면서 천천히 그런 선입견을 버릴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 윤가은 감독의 경우처럼, 부드러운 성향과 훌륭한 인품으로 동료들의 신뢰를 사면서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한 예를 지금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요즘 애들도 태권도를 다닐까?’
단순히 유행이 지나갔을 뿐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배우라며 등 떠밀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변화가 참 반갑다. 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겨루기를 즐기는 척, 태권도를 좋아하는 척하지 않아도 괜찮은 분위기가. 애써 유능해 보이려고 동료 스태프들에게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때로 상업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아직까지는 지위에서 오는 힘을 적극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게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따 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역시 조금씩 바뀌어 갈 거라는 확신이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여전히 고리타분한 관성에 갇혀 있는 이들이 많이 보이지만, 내가 변화의 최전선에 서지 못하더라도 한 발 앞장서 세상을 바꿔 가는 선배들이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게 느껴진다. 현장 내 성차별이나 노동력을 갈아 넣는 기형적인 시스템 등의 여러 문제가 크고 작은 개선을 거듭해 온 것도 그들이 부조리에 맞서 가며 남겨 준 유산이다. 나와 동료들은 그런 고마운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