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뭐가 그렇게 급한 거예요...?
영상 회사에 다니던 때엔 소위 ‘트렌디’ 한 영상을 흉내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었다. 회사에서 만들고자 했던 콘텐츠나 클라이언트가 요구했던 광고, 홍보영상의 콘셉트 레퍼런스는 대부분 당시 가장 유행하는 웹 예능이나 밈(meme), 광고 등이었고, 자연히 인기 콘텐츠의 감성과 편집 스타일을 비슷하게 재현한 영상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어디서 본 듯한’ 영상을 만들어 내는 일. ‘유행’이라 하면 본능적인 반감부터 작용하는 내게 그런 일이 재밌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디서 본 듯한’ 영상을 그럴듯한 퀄리티로 충실하게 찍어 냈을 때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얻었다. 칭찬을 받는데 기분이 나쁠 리는 없었지만, 보다 오리지널에 가까운 뭔가를 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나는 유행에 민감한 편이 아닌 탓에 회사 대표나 클라이언트가 트렌디 한 영상을 만들어 주길 요구할 때면 한동안 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트렌디 함이란 필시 자신이 요즘 꽂혀 있는 영상 콘텐츠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당시 ‘병맛’이라는 키워드로 수없이 복제되었던 허무맹랑한 콘셉트의 광고나, 정신 산만한 편집으로 도파민을 쉴 새 없이 분출시키는 예능 영상 같은 것. 통장에 매달 월급이라는 사료를 부어 주시는 분들의 요구인 만큼 내가 제작할 영상에는 반드시 그 트렌디 함이 반영되어야 했고, 나는 레퍼런스 참고라는 명목으로 업무 시간에 유튜브로 광고나 예능 영상을 보며 유행을 학습해야 했다.
이 같은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멍청한 걸 왜 보는 걸까?’ 한때 광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병맛 콘셉트는 너무 많은 아류와 자기 복제로 헛웃음만 자아냈고, 예능은 하나같이 ‘누가 더 정신없게 편집하나 콘테스트’에 출전한 듯 엄청난 양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욱여넣고 있었다. 강박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입 꾹 닫고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업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니 콘텐츠가 재미없었다고 할 순 없겠으나, 보는 내가 너무 빨리 소진되는 느낌이었다. 좋은 콘텐츠를 접했을 때 정서적 포만감이 찾아오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었다.
유튜브로부터 잠시 눈을 돌린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영상 트렌드가 병적으로 변했거나, 내가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꼰대가 된 게 틀림없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월급 받고 할 일을 해야 하는 영상 노동자였고, 최대한 내가 이해한 트렌드를 반영해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 회사에서 근무하며 마음 한편에서는 늘 영화 만들 궁리를 하고 있는 내게 이러한 트렌드의 변화는 때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영상 트렌드가 변한다는 건,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가 보고 싶은 날이면 비디오 대여점에 들러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날 볼 영화를 신중하게 고르는 마음과, 넷플릭스에서 수천 편의 영화를 스크롤 하는 마음은 어떻게 다른가.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손에 넣기 쉬우면 쉬울수록 그것을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은 줄어들곤 한다. 비디오 시청자는 영화가 재미없어도 테이프를 빌려 온 수고를 생각해 끝까지 영화를 보겠지만, 넷플릭스 시청자는 도입부 5분 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금방 다른 콘텐츠를 찾아 떠날 것이다. 유튜브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영화처럼 두 시간이 아니라 10분, 5분, 짧게는 몇 초를 소비하려고 찾는 플랫폼인 만큼 시청자에게 집중해서 보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얼마 전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고 새삼 충격에 빠졌다. 영화,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를 배속으로 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책에 따르면 그것이 무려 전체 소비층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일본 사람인 데다 어디까지나 일본 사람들의 영상 콘텐츠 소비 형태를 분석한 책이기 때문에 이를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공통적 현상으로 볼 순 없겠지만, ‘배속 시청’이 소수의 유별난 시청 습관이 아닌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낀 충격은 상당했다. 이들에게 영화나 드라마는 최대한 작가와 감독, 스태프들의 본래 의도대로 감상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시청에 드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여 ‘가성비 있게’ 내용을 흡수하기만 하면 되는 소비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 사람들이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해 영화를 정속으로 봐주리라 믿어 온 것이 지나치게 순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배속 시청이나 지루한 장면을 ‘스킵’ 해서 보는 행위가 못마땅한 건 사실이지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넷플릭스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또는 필름을 사랑하는 영화인들이 디지털 시대를 거부할 수 없듯이.
뻔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목격하면서도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으니, 나 또한 새로운 시청자의 요구에 발맞춰 새로운 형태의 영화를 만들어 봐야겠다. 이를테면 1.5배속으로 재생되는 영화는 어떨까. 구태여 재생 속도를 조절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1.5배속으로 달려가는 영화라면 나름 주목을 끌 수 있지 않을까. 훗날 나보다 먼저 1.5배속 영화를 만드는 이가 있더라도, 그 아이디어는 내가 먼저 이 글에서 제시했음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면 멍하니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광경을 카메라가 풀 샷으로 담고 있는 듯한 착시를 느끼곤 한다. 저마다 소셜 미디어나 유튜브, 넷플릭스, 웹툰 따위를 보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나에게는 그들 모두가 내 영화의 잠재적 관객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쩐지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린 그 광경이 몹시 낯설고 망연하게 느껴진다. 친근감을 느껴야 할 그들이 데면데면하다. 언젠가 내 영화는 저들에게 본래의 속도대로, 내가 의도해 만들어진 그 모습 그대로 가 닿을 수 있을까? 훗날 지하철에서 내 영화를 1.5배속으로 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어쩐지 상상 속의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서 1.5배속도 정속도 아닌,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