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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정동진독립영화제 포에버

by 전수빈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여러 모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무렵, 내 영화 <지구 종말 vs. 사랑>이 ‘정동진독립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 소식까지 있었기에 그야말로 겹경사가 난 것이었다. 후반작업 과정이 유난히 어려웠던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선뜻 기쁜 소식이 연이어 날아들 줄은 몰랐다. 회사에서 예정되어 있던 행사 촬영 기간이 정신 차릴 새 없이 지나가고, 드디어 정동진 가는 날이 다가왔다. 지난 한 달을 이날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KTX로 약 1시간 30분, 영화제가 운영하는 셔틀 버스로 30분을 더 달려서 도착한 정동진은 비록 미친 듯이 더웠지만, 눈으로만 보기엔 마냥 예쁘고 산뜻한 곳이었다. 영화제가 열릴 정동초등학교를 지나 숙소를 찾아가는 길, 먼저 도착해 카페에서 쉬고 계시던 배우님과 만나 곧장 바다로 달려갔다. 정동진해수욕장은 부산의 해운대나 광안리해수욕장의 다소 탁한 색상의 물과는 차원이 다른 수질을 자랑했다. ‘아, 바닷물이 이렇게나 맑은 거였다니!’


오후 6시를 넘겨 입장한 정동초등학교 안 풍경은 어느 여름날의 락 페스티벌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운동장 양옆에서는 모기나 날벌레를 쫓기 위해 쑥불을 피우고 있었고, 수천 명의 관객들이 저마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스크린을 마주보고 있었다. 영화제를 즐기러 왔다기보다는 흡사 피크닉을 즐기러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는 준비해 간 돗자리가 없어서 게스트 패키지로 받은 가방을 북북 찢어서 임시 돗자리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합류한 스태프, 지인과 함께 금요일 밤의 영화제 멤버를 결성했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이보다 더 찰떡일 수 없는 구호를 다 함께 외치며 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그 누구라도 붙잡고 ‘살면서 꼭 한 번은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커다란 스크린 뒤편으로는 우뚝 솟은 산이 어스레하게 보이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면 수십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이곳의 관객들은 여느 영화제 관객들과는 다르게, 스크린 속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호응하고 대화를 나눈다. 안타까운 장면이 나오면 “어~” 하는 탄식이 들려오고, 수시로 웃음이 터지고, 만족스러운 장면에서는 박수까지 아낌없이 쏟아진다. 마치 극장이 아니라 안방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


이날은 내 생애 처음으로 별똥별을 본 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와중에 아주 짧은 순간 반짝이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목격하고서 ‘와, 별똥별이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구나!’라는 새삼 멍청한 생각을 했다. 개별 작품에 대한 호오를 떠나 그 시간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것 자체에 행복을 느끼며, 왜 모두가 그토록 정동진독립영화제를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튿날 토요일은 우리 영화가 포함된 섹션이 상영되는 날이었다. 이날 새롭게 합류한 멤버들과 함께 해수욕을 즐기고, 영화제 측에서 준비한 수구 한 게임에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승부욕을 불태우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이었다. 전날보다 구름이 껴 있어서 그런지 더 운치 있게 느껴지는 날씨에, 설레는 마음으로 정동초등학교로 향했다.

우리 영화는 이날 두 번째 섹션의 마지막 상영 순서였는데, 그 때문에 나는 앞서 상영된 영화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신경이 온통 내 영화를 상영할 때의 관객 반응에 대한 기대와 걱정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두근두근 <지구 종말 vs. 사랑>의 상영 시간. 이미 정동진의 공기에 한껏 마음을 내어준 관객들이었기에 어느 정도 호응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웃고, 때로는 안타까워하고, 갈등이 소강되는 시점에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주는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나 신기하고 즐거웠다. ‘아, 녹화라도 해 둘 걸...’ 두고두고 돌려 보고 싶은 찰나의 순간들이 아쉬움 섞인 행복감과 함께 지나고 있었다.


약 3천 명의 관객들 앞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GV도 무사히 끝나고, 강당에서 이어진 뒤풀이 행사 ‘인디파워나잇’에 참석했다. 원래는 우리 여덟 명의 멤버가 따로 MT를 즐기려고 멋진 펜션을 예약하고 게임도 하며 놀 계획을 세워뒀지만, 영화제 측에서 준비한 행사인 만큼 조금 즐기다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먼저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조현철 감독 겸 배우, 조은지 감독 겸 배우, 공민정 배우, 강말금 배우, 박종환 배우 등 작품으로만 봐오던 유명인들이 너무나 수더분한 모습으로 나와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해서 많이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문득 ‘아, 저들도 그냥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인’이라는 베일을 걷고 보면, 그들도 그저 동시대에 영화를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말 한번 섞어 보지 못한 그들이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람들로 복작이는 공간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산책을 하고 싶어져서 강당을 나와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날의 분위기에 젖어 한껏 감상적인 기분으로 걷다 보니, 나처럼 혼자 밖에 나와 있던 스태프이자 친한 동생을 마주쳐 둘이서 천천히 운동장을 거닐었다.

영화제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소회를 나누고, 밤하늘의 별도 구경하고, 관객들로 가득 차 있던, 지금은 어둠 속에 고요히 텅 비어 있는 운동장을 바라보고, 간간이 강당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순간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그 순간이 못 견디게 그리워져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몇 마디 말로는 다 정돈할 수 없는 복잡한 감흥이 마구 밀려든 탓이었다. 내가 울기 시작하니 그 친구도 훌쩍훌쩍 울음이 터져서 참 민망하고 미안한 사태가 벌어져버렸다.

산책이 끝나고도 눈에서 붉은 기가 안 빠져 울었던 티가 날까 봐, 우리 둘은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강당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새벽 4시를 넘겨서야 빠져나온 우리 멤버들. 당초 계획대로 우리만의 MT를 즐길 시간이 없어진 건 못내 아쉬웠지만, 모두가 ‘그래도 재밌었다’고 말해줘서 안도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점심으로 망치 매운탕을 먹고서 남아 있던 멤버들과 작별했다. 애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헤어져 헛헛한 마음을 오징어먹물빵으로 달래며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데, 조금 ‘무섭다’ 싶을 만큼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아서 가는 내내 책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영화제 상영이 끝난 이후처럼 수많은 관객들이 우리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남겨주었는데, 개중에는 단순히 좋은 감상을 넘어 특별한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말 그대로 ‘눈물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약간의 섭섭함과 남은 시간을 더 힘차게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가 남았다. 앞으로 또 이런 날이 내게 올 수 있을까 싶지만, 언제까지고 그 의지를 붙들고 영화를 계속할 수 있다면 이런 마법 같은 시간이 다시 찾아와줄 거라고 믿는다. 부디 그날까지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장수하길 바라며 구호를 외쳐 본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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