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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희 Sep 24. 2024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

episode 3. 1학년

미대생이 되었다. 고등학교와는 달리 크고 높은 대학 건물들, 뻗은 도로, 그리고 어쩐지 여유롭게 등교하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까지. 20살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고등학생인 것 같았다. 그러나 대학교 정문에 들어서고, 함께 등교하고 있는 주위 학생들을 바라보고, 미대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체감이 되었다. 


'그래, 나 대학생이구나. 이제 전공으로서 미술을 하는 거야.' 


어릴 적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려왔고, 입시 미술도 거쳐 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미술을 전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앞으로 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미술 학원과는 달리 대학교에서 그리는 것은 어떨지 설레기도 했다. 



사진기가 아닌, 작가로서의 마음가짐


이제 막 대학생이 된 1학년 학생들을 모아놓은 전공 수업이었다. 교수님을 빙 둘러싸고 앉은 학생들은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자, 이제 어떤 것을 알려주실 건가요? 뭘 그리면 되나요? 교수님은 이번 학기에 수업이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지, 과제는 어떤 것들이 주어지는 지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셨다. 중간고사로 언제까지 과제 1 제출.. 기말고사로 언제까지 과제 2 제출.. 그런 사항들을 빼곡히 적어나갈 때 즈음, 교수님께서 당부의 말이 있다면서 빙그레 웃으셨다.


'여러분들은 사진기가 아니에요.'


무슨 말이지?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갸우뚱했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작가로서 무엇을 보고 있느냐죠. 이번 수업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네요.'


보이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 중요했던 나에게 교수님의 그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꽤나 충격적으로 들렸다. 입시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같은 물체를 보고 그릴 때 누가 단기간에 그 물체를 잘 그려내는 가였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작가로서 무엇을 보고 있느냐'였다. 난 그냥 물체를 보고 그렸을 뿐인데, 작가로서 그린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필요한 걸까? 


걱정과는 달리, 상상해보지 못했던 재밌는 수업들이 이어졌다. 물건 위에 천을 올려두고, 천의 실루엣을 보며 안에 어떤 물건이 있을지 상상해서 그리기도 했고, 어떤 대상을 가운데에 두고서 그 대상이 가진 여러 특징들 중 어느 부분을 주제로 가져가고 싶은지를 정하기도 했다. 각자 시간을 갖고 그린 뒤 쭉 펼쳐서 함께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같은 것을 보고 그렸음에도 학생들의 그림은 전부 달랐다. 그런 과정을 거치니 천천히 이해가 되었다.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더라도, 각자에게 받아들여지는 바가 다르구나. 보는 게 다가 아니구나. 우리는 어떤 것을 바라볼 때 각자의 관점을 지니고 그것을 바라보며, 각자의 관점을 바탕으로 표현해 내는구나. 

'본다는 것'에 대해 나름 고심했던 내가 이를 바탕으로 제출한 과제 일부분을 발췌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갖게 된다. 이것은 다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능력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익숙하며 자연스럽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그저 눈을 떠서 눈의 각막에 비친 상을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눈에 의해 보이는 것에 대해 개인 고유의 의식이나 감정, 느낌 등을 더하면 우리는 더 깊은 차원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마음을 통해 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공감이나 생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확립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미술작품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그 그림의 형태나 색채 등을 보는 것은 눈을 통해 그 작품을 본 것이다. 작품 안에 숨겨진 작가가 하고 싶은 내용을 보거나 작품을 본 후 슬픈 등의 감정이 들면 그건 마음을 통해 본 것으로 눈으로 본 작품을 한층 더 깊이 감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대상을 보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 걸까?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그림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걸까?



주제에 맞는 표현방법 선택하기


늘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대상을 선택하는 것엔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그냥 사람을 그리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의 어떤 부분을 그릴 것인가,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내가 직면한 문제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씩 던지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Q. 그래서 사람의 어떤 부분을? 어떤 포인트를 주제로 삼을 건데?

A. 글쎄.. 근데 항상 사람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있어. 그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감정을, 타인이 볼 수 있도록 겉으로 표현되는 거. 우린 표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는 거잖아.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느낌을 통해 이 사람이 어떻겠구나를 이해하는 거고. 수업 때 물건 위에 천을 올려놓은 실루엣을 보고 그 안의 물건을 추측하는 것처럼, 여러 감정을 느끼는 마음 위에 사람의 겉면을 씌워둔 게 표정인거지.


Q.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표정을 통해 그 감정을 짐작하는 타인? 이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건데?

A. 몰라.. 나도 머리가 복잡해. 잠깐만, 한번 고민 좀 해보자. 근데 애초에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기 위해, 흑백 인물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내 인상이나 느낌, 감정을 표현해 보면 좋지 않을까? 어떻게 표현될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그래서 무슨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노트에 그리며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나갔고, 아래 이미지는 아이디어 스케치의 일부다. 자세히 보면 큰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은 얍삽한 마음도 숨겨져 있다. 4개 그리긴 힘드니, 3개로 작품 수를 은근슬쩍 줄였다.


아이디어 스케치

대략적으로 정리된 표현 방식은 아래와 같았다. 분노, 놀람, 슬픔. 가지 감정을 주제로 잡고 표현 방식을 구상했다. 고민했던 표현 방식을 읽고 바로 아래의 실제 작품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잘 느껴질지 궁금하다. 


1) 분노

- 캔버스 측면이 두꺼운 걸 골라서, 좀 더 튀어나와 보이게 표현하기

-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고 대비가 극명한 표현 방식 사용하기

2) 놀람

- 보는 각도에 따라 반짝여보이고, 반사되는 바가 달라질 수 있도록 미러지 위에 그리기

- 노란색같이 경쾌하고 발랄한 색감을 많이 사용하기

3) 슬픔

- 캔버스 측면이 얇은 걸 골라서, 뒤로 빠져있는 것 같은 느낌 주기

- 파란색을 주로 사용하고, 축 쳐지는 느낌이 살도록 물이 흘러내리는 표현 방식 사용하기


[흑백의 감정 시리즈] : 캔버스에 유화_35 x 35 cm / 미러지에 아크릴과 유화_35 x 27 cm / 캔버스에 유화_41 x 24.3 cm


그렇게 처음으로 주제를 고민하고, 그 주제에 맞는 표현 방식을 고민하고, 그것을 구현해 내는 과정을 거쳤다. 당연히 아쉬운 점이 많았고 이게 맞나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구상한 처음부터 완성해 내는 끝까지 내가 끊임없이 고민했다는 점이 새롭고 좋았다. 그렇게 완성한 '흑백의 감정 시리즈'는 사진기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포착해 낸 흑백 인물 사진에, 내가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한 의도를 넣은 작품이다. 또한, 어찌 보면 처음으로 내 작품에 끝까지 책임을 진 작품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려야 하는 그림에서 벗어나, 어설프지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고민해 본 첫 순간이 된 것 같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니, 미대에서 앞으로 배워나갈 것들이 더 기대가 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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