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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희 Sep 17. 2024

결국엔 그려야 하는구나

episode 2. 대학 입시 

'나 그림 안 그릴래.'


일반고에 입학하고 나서, 그 말을 내뱉는 게 어렵지 않았다. 기대했던 예고의 교복이 아닌, 회색의 투박한 교복을 입으며 나는 퉁명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 미대 안 갈래.'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도 내 뜻을 존중해 주셨다. 그만큼 예고 입시에서 떨어진 것은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꽤나 타격이 컸다. Step 2(episode 1. 참고)에 해당하는 예고 입시에 불합격한 뒤엔, 그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일반고에서 미대에 간다는 것은 '예고에서 실력을 갈고닦아 미대에 입학'하는 Step 3의 난이도보다 훨씬 어렵다. 너무 먼 미래를 앞서 본 나는 그림에 대한 의욕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젠 흰 종이 앞에서 뭘 그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림이 싫은 게 아니라, 실패한 내가 싫은 거야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교내 사생대회 수상작

'너 그림 잘 그린다'


붕 떠버린 마음과 달리 그림 실력은 어딜 가지 않는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사생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연습했던 게 그대로 출력되었다. 묘사할 많은 나무를 앞쪽에 배치하자. 최대한 앞에서 세밀하게 그려내고, 뒤의 배경은 풀자. 그림자를 넣어서 분위기를 내자. 그런 계산이 자연스럽게 되었고, 계산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머릿속에 '그래봐야 예고에 떨어졌는데'와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자꾸만 예고에 불합격한 뒤 아무 말도 못 하고 먹었던 엄마의 생신 케이크가 떠올랐다. 그런데도 또 교내 상을 받았고, 반친구들에게 '그림 잘 그리는 애'로 소개가 되었고, 그림이 내 곁으로 어떤 신호도 없이 또다시 다가왔다. 



입시 시험이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났지만, 그럼에도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내 몸에 배어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시험을 치지 않고 내 그림이 평가를 받지 않는다면, 그림 그리는 건 꽤나 즐거움을 인정해야 했다. 그림 그리는 게 싫은 것이 아니다. 내가 하얀 빈 종이에 무언갈 그리기 힘들어진 이유는 예고 불합격 때문이 아니라, 웃기게도 나 때문이었다. 안에 깃든 부정적인 마음들이 그림을 그릴 때마다 불쑥 쳐들어왔다. 


'예고에 떨어진 주제에, 불합격한 그림을 그린 주제에' 

'다들 초등학생 때부터 준비하는데, 늦어버린 고등학생이 무슨 미대에 가겠다고'

'게다가 예고 입시에도 얼마나 큰돈이 들었는데, 미대 입시까지 어떻게 하겠다고 그래?' 


마음들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미대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그림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하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하게 다가왔던 건 내가 미술과 관련하여 한 번의 고배를 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배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꺾어버렸다. 나 자신에게 어떠한 기대도 걸고 싶지 않았다. 그저 불합격한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남도록. 



그럼에도 미래를 꿈꾼다면


1년 정도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성적을 만들어두면 나중에 뭘 하든 도움이 되겠지라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에 응하듯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고, 다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이 아니더라도 공부를 잘하니까, 뭐라도 잘하는 학생이니까. 그런데 막상 학교에서 받은 진로 상담에서 내 생각의 구멍이 탄로 났다. 어느 대학을 가고 싶은지, 어느 전공으로 가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미대를 안 가겠다고 했지만, 미술을 빼고 어떤 미래를 꿈꿔야 하는지를 모른다. 내가 꿈꿔왔던 미래에는 항상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고를 불합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대에 진학하는 것을, 그림을 그리는 미래를 꿈꿔도 되는 걸까?


'넌 그림 그려야겠다.'


학교 미술실에서 수행평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등뒤에서 미술 선생님이 중얼거리듯 말씀하셨다.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미술 선생님과 함께 물끄러미 바라봤다. 난 멋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미술 선생님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네가 좋아하고, 잘 그리면 됐지. 뭐 다른 조건이 필요해?'


정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 그린다는 것 말고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선생님, 제가 꿈꾸는 미래에는 비용이 드는데요. 부모님은 제 앞에선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제가 자신만만하게 예고 입시를 할 때 너무 큰돈이 들어 급하게 통장을 깼다고 하시는 얘기를 들었어요. 예고 입시가 그 정도였는데, 미대 입시는... 그림을 좋아한다는 저의 알량한 그 마음만으로는 안되지 않을까요?

 

'네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 실력이 아깝잖아. 그림 그리는 게 좋잖아.'


예고에 불합격한 뒤 미대에 입학할 수 있는 Step들이 다 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꿈꾼다면 미대에 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그림을 그리는 전공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예고 입시와는 달리, 미대 입시는 정말 절박한 마음으로 도전했다. 학원비가 저렴한 편에 속하면서도 대학 합격자가 많은 학원을 찾아다녔고, 하교하자마자 간식을 입에 물고 곧바로 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만약 이번에도 입시에서 고배를 마신다면, 그땐 정말 내가 날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썼던 다이어리의 맨 첫 장



결국엔 미대 입학.. 꿈꾸던 미래가 열렸나?


'손', '종이'로 자유구상. 손을 활용한 시험문제가 많이 나왔던 때가 있었다.  

평상시처럼 하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내가 지원한 대학의 수시 합격자 발표가 났다고 알려주셨다.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폭발할 것처럼 머리에 피가 쏠렸다. 대학에서 합격자 발표가 나면 학원에서 바로 연락해 줄 거라던 학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합격자 발표가 이미 났는데, 왜 학원에서 연락이 안 왔을까? 미술 학원에서는 이미 확인을 했을 텐데 왜 아무 연락이 없을까?


'혹시 나 불합격했나..?'


합격 여부를 함께 확인해 주겠다는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사양한 뒤 천천히 집으로 혼자 걸어가는 길에,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들이 꽉 차버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 구석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벤치에 몸을 잔뜩 구기고 앉아 물끄러미 연락이 오질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용기를 냈다. 결과는 내가 확인해야 한다.

'손', '석류'로 자유구상. 정말 손 그리는 연습을 많이 했구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결과를 확인했을 때, 머리끝까지 쏠렸던 피가 천천히 빠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끝났다.' 


대학에 합격하면 뛸 듯이 기쁠 줄 알았는데, 기쁜 마음보다 더 먼저 찾아온 건 깊은 안도감이었다. 항상 날 괴롭히던, 불합격할 거란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았고, 결국엔 내가 그 불안감을 견디고 해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슬픔이 몰려왔다. 어린아이처럼 혼자 10분 넘게 펑펑 울다가 엄마에게 전화했다. 


'나 합격했어, 엄마.'


이 말을 어찌나 하고 싶었던지. 

예고 입시 때부터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내뱉었다.

내가 해냈어.


합격 소식에 기뻐하는 부모님,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언니,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던 친척들, 다독여주던 친구들. 그들을 보며 나도 미소 지었다. 드디어 그 길고 길었던 입시가 끝난 것이다. 나에게 어떤 미래가 찾아올 것인가에 대한 설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만 모일텐데 내가 안에서 적응할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잠시간 찾아온 평화를 느끼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젠 정말 미대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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