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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희 Sep 10. 2024

그리고 싶은 그림과 그려야 하는 그림

episode 1. 그림의 시작 ~ 예고 입시

유치원생 시절 그림. 이때의 그림, 꽤나 상당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건, 5살 때부터였다. 말괄량이에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좋아했던 어린 내가 좀 차분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 언니와 함께 미술학원에 보내셨다. 사실 그 미술학원은 6살 이상만 받았지만, 워낙에 내가 키가 컸던 터라 미술학원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 옆의, 작은 상가에 있던 미술학원이었다. 학원에 들어서면 창문으로 햇살이 따사롭게 들어왔던 게 생각난다. 그땐 미술학원 선생님과 놀고, 친구들과 떠드는 재미로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림 그리기'가 취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꼼꼼히 색칠하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재미를 키워갔다. 차분히 집중해서 그림 그리고 있던 어린 날의 나에게, 엄마가 넌지시 물었었다.


'너 그림 그리는 게 좋아?'


그땐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입시의 시작: 그림 그리는 게... 좋아?

내 그림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너 그림 잘 그린다'


그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새로운 개념이 추가되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이 둘은 개념이 다르다.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평가가 들어가지 않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평가가 들어간다. '잘 그리는 것'과 '못 그리는 것'.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듣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모르는 반 친구들에게 나는 '아 그 그림 잘 그리는 애'로 소개되었고, 독서감상화 그리기 대회, 불조심 그리기 대회,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 심지어 소설캐릭터 그리기 대회까지 교내의 미술과 관련된 상은 다 휩쓸었다. 그러자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 눈에도 들어와, 학교 추천으로 구에서 뽑던 '미술 영재' 타이틀도 얻었었다. 그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잘 그리기 때문에 좋아한다'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나 그림 잘 그리는구나'가 친구들의 입소문, 교내에서 받은 상, '미술 영재'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미술 영재' 타이틀을 얻는 순간, 부모님에게도 나의 진로가 공고해졌다. 


'쟨 아무래도 미술을 시켜야 할 것 같아.'


중학생 때부터는 화려하게 입지를 굳혀갔다. 희망 진로에는 항상 '화가'를 적었고, 부모님이 희망하는 진로도 '화가'였다. 부동의 '화가'는 그렇게 중학교 3년을 함께 갔다. 그리고 화가가 되기 위해서, 미술과 관련하여 아는 바가 전무했던 내가 떠올린 가장 첫 번째 단계는 '미대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 부모님이 알아보신 방법은 '예고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난 늦은 편이긴 했다. 소위 '엘리트 코스'로 미대를 입학하는 학생들이 밟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과거를 기준으로 했을 때지만, 지금도 비슷할 것이다). 


Step 1.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 준비를 하여, 예중에 입학.

Step 2. 예중에서 실력을 갈고닦아 예고에 입학.

Step 3. 예고에서 실력을 갈고닦아 미대에 입학.


놀랍게도, 알아주는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 꼬꼬마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붓을 잡고 사과를 그린다(심지어 잘 그린다). 그런 충격적인 모습을 나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접했다. 입학시험 때 그려내야 하는 그림은 그리고 싶은 그림과는 다르다. '입시 그림'이라 함은,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그림을 출력해 내는 것이다. 같은 주제로, 같은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그림을 그린 것을 비교해서 보게 되면 확연하게 차이가 보인다. 그럼 그중 가장 주제를 멋진 표현 기법으로, 완성도 있게 그려낸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동안의 나는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렸지 그려내야 하는 그림을 그리진 않았다. 또,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학교 3학년 때 소위 Step 2에 해당하는 '예고에 입학'을 준비하기 시작한 나는 많이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땐 '나는 잘 그리는 사람이니까'의 마인드에 취해있었는지, 늦었다는 것에 대한 큰 부담감은 없었다. 


'하면 되지. 예고 입학.'


하지만, 그때부터 '좋아하는 그림'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무얼 그려내고 있는지, 이 그림이 어떤 것을 위한 것인지를 이해하기엔 좀 어렸다.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다지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방학 땐, 하루종일 미술학원에 있으면서 아침, 점심, 저녁 3 타임씩 돌아가며 시험을 치렀다. 수산시장에서 볼 수 있는 파란 간이의자 위에 앉아, 몸이 찌뿌둥해질 때까지 그림만 그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예고에 입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은 미래처럼 느껴졌다. 


중학생 시절 그림. 전형적인 입시 형식의 그림이다. 물론, 어설픈 면이 많다만..



불합격한 그림,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나


위풍당당하게 예고 입시 시험을 보러 갔지만, 시험장에서 나올 땐 벙찐 표정으로 나왔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다른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림은 잔인하다.


'내 그림은 불합격이다.'


하필이면 예고에서 떨어졌던 그날이 엄마의 생신이었던 게 날 더 좌절시켰을지도 모른다. '미술 영재'인 딸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며 학원에 보냈음에도 처참히 예고에서 떨어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자신만만했으나 불합격한 그림을 그려낸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묵묵히 케이크를 먹었다. 왜 그렇게 밖에 못 그렸을까? 난 겨우 그 정도 그리면서 왜 '잘 그린다'라고 자신만만했을까. 게다가 그림엔 실수가 없어 변명도 할 수 없다. '그려야 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예고에 불합격하는 순간 그 그림은 의미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입시를 위한 그림은 합격/불합격을 위한 그림이었기 때문에, 불합격한 그림은 그저 '합격하지 못한 그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난 '그려야 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싶은 그림도 잊어버렸고,

그려야 하는 그림도 손에서 떠났다. 

그렇다면 그림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난 크고 무섭도록 하얀 종이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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