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 2학년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1학년이 지나가버렸다. 새내기 기간은 고등학교와는 너무도 다른 대학교만의 체계를 이해하는데 에너지를 썼다. 수강신청은 어떻게 하는지, 수강신청에 실패하더라도 어떻게 전공을 건질 수 있는지, 교수님께 어떻게 메일을 보내는 게 예의 바른 것인지, 전공에선 보통 과제가 몇 개 정도 나오고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는지 등등.. 알아야 하는 정보는 무수히 많았다.
쏟아지는 정보들을 주어 담아 머릿속에 넣으려고 애를 쓰자, 제법 미대생다워졌다. 어떤 의도를 담을지 고민도 해보고, 어떻게 표현해 볼 지도 고민하고, 어떻게 전시할 지도 고민해 보는. 그렇게 1년을 무사히 끝낸 뒤 새내기의 탈을 벗었고, 눈을 반짝이는 후배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선배들을 봤던 것처럼, 나도 그들 눈엔 멋진 선배처럼 보일까 기대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1학년 때 들었던 강의는 앞에 '기초'가 붙는, 천천히 그리는 재미를 느껴보라는 취지의 강의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미대의 시작은 '기초'가 떨어져 나간 2학년부터였던 것이다.
갑자기 입시를 탈피하라고요?
2학년 때 들어야 하는 과목 중 하나인 '드로잉 워크숍'을 수강했다. 수강신청을 할 때, '드로잉 워크숍'이라는 강의명을 보고 막연히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여러 재료로 드로잉 해볼 수 있는 과목이겠거니.. 개강 후 수업 첫날, 나는 1학년 때와는 달리 묘하게 진중해진 수업 분위기를 느꼈다. 분위기부터 범상치 않은 교수님은 듬성듬성 자란 수염을 몇 번 만지다가,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들 아마 열심히 대학 입시해서 들어왔을 거예요. 이제부턴 지금까지 배운 거, 다 지워버려야 해요.'
다 지워버리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구도 맞춰 그리고, 배경을 어떤 색으로 깔고.. 예중 입학해야 하고, 예고 입학해야 하고.. 그렇게 정해진 입시는 대학 입학까지만 필요한 거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아니에요. 한국의 미술 입시는 데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보통 미대생들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작가마다 다른 예술성을 갖고 있으니까 관습에 얽매이지 않도록, 입시 그림에서 탈피해서 본인만의 드로잉 스타일을 찾는 겁니다.'
그 말은 마치 내 고등학생 시절에 대한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입시에서 유리한 구도를 외우기 위해 입시작들을 계속 보면서 눈에 익히고, 빠르게 명암을 넣기 위해 연필을 힘주어 잡는 법을 배웠던 그런 시간들을 지워버려야 한다고? 처음엔 그런가..? 싶은 생각에 멍해졌다. 하지만 점차 머릿속에 선명한 물음이 떠올랐다.
'그럴 거면 대학은 입시를 왜 하게 한 거야?'
이렇게 그려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해서 겨우 익혔더니, 그건 오히려 미대생의 예술성을 가리는 짓이고 이제 작가로선 필요 없으니 잊어버리라고? 그걸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요?
고등학생 때 학원에서 혼나며 그림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혼자 잠재우다 집에 와서 울던 어릴 때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꽉 채우며 분노가 치솟았다. 한동안 분노와 노력에 대한 억울함으로 괴로웠지만, 점차 힘이 빠지면서 다시 머릿속이 평온해졌다. 여전히 화가 나지만, 새로운 물음이 떠올랐다. 입시 그림을 그려왔던 방법들을 지워버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렵게 채워 넣은 입시 기술들이 사라진다면, 내 그림엔 어떤 게 남을까?
'본래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왔더라?'
그린 건 2주, 평가는 5분
'재미없어, 너무 입시 그림 같아.'
교수님의 첫마디였다. '재미없다'는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텁하고 목구멍이 막힌 새에, 교수님은 바로 다음 학생의 평가로 넘어갔다. 고민하며 그린 시간에 비해 1차 과제 평가는 상당히 빨리 끝났다. 내심 중간에라도 추가로 평가를 해주지 않으실까 했지만, 다음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미없다'는 말에 내가 어떤 대답을 했어야 한 걸까?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보다, 재미있는 그림과 재미없는 그림의 기준이 훨씬 더 모호하고 어렵다. 어떤 게 재밌는 부분이지? 그리고 지금 내 그림에서 어떤 걸 보완해야 재밌는 그림이 되는 지도 알 수 없다.
이제 타인에게 평가를 받는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 무관심한 것만큼 더 큰 상처가 없다. 2주간 그림을 그렸지만, 평가는 한 사람당 5분 안에 끝난다. 그리고 소위 '재미없는' 그림을 그린 경우엔 더 짧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간혹 '재밌는' 그림을 그린 학생의 경우, 20분이 넘게 칭찬할 때도 있다.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는데, 자꾸만 내 그림과 20분 넘게 칭찬받은 학생의 그림을 비교하게 된다. 한 번의 과제 발표였지만 오만했던 마음이 바닥으로 푹 꺼진다. 물감이 묻어 지저분해진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내 그림의 어디까지가 입시 미술인가?
새벽에 그릴 때 불안감이 잦아든다. 이번엔 어떻게 그려볼까 골머리를 쓰다, 붓이 꺾이고 갈라지는 대로 쓱쓱 그려나갔는데 웬걸?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왔다. 그 새벽에 조금 신이 나서 내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번엔 내가 아는 입시 미술과는 달라, 괜찮은 것 같아.
실기실 바닥에 드로잉들을 깔아 두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니, 바닥에 수없이 놓인 학생들의 드로잉 중 내 거가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설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교수님은 내 드로잉만 피해서 주변에 있는 학생들의 드로잉을 칭찬했다. 본 듯 보지 않은 듯, 정말 내 그림이 안보이시나? 교수님의 왼쪽에 놓인 드로잉들을 모두 지나치고,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학생들도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몰려드는 도중, 내 드로잉이 여러 학생들에게 치여 흩어졌다. 흩어진 드로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다시 잘 정리한 뒤 나도 교수님을 쫓아 오른쪽으로 갔다.
수업 시간이 좀 남자, 교수님이 평가하지 않고 넘어갔던 드로잉들을 하나하나 조언해 주기 시작했다. 이미 좋은 평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다시 내심 기대감이 차올랐다.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그 말 한마디면 되는데. 하지만 또다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내 그림은 무시하고 지나치셨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평가를 받지 못하자, 난 듣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용기를 내어 교수님께 달려가 조언을 구했다. 교수님은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지으며 내 드로잉들을 천천히 살펴보셨다.
'솔직히 재미없어. 드로잉이 너무 입시적인 느낌이 나.'
그리곤 실기실 밖을 나가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드로잉과 눈을 맞췄다. 교수님의 말에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한편으론 오기가 생겼다.
뭘 해도 입시 그림이라고 한다면, 어떤 점 때문에 입시 그림으로 보이는 걸까?
입시가 아닌 그림을 그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