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2학년
돌파구가 필요했다. 입시가 대학 입학까지만 필요했던 거라면, 원하는 대로 이젠 입시 형식을 벗어나보자. 입시를 벗어난 그림을 그려보자. 그런데 말이 쉽지, 그걸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입시 그림은 이제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에 배어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손에 익은 습관 없애는 오만가지 방법
정말 별별 방법들을 다 시도해 봤다. 가장 먼저 시도해 봤던 건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는 거였다. 오른손잡이로써, 이미 입시 감각이 배어있고 물체를 보면 정확하게 형태를 떠내는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왼손으로 인물을 그리는 과정을 반복했더니, 이젠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그다음엔 눈을 감고 그려볼까? 직접 그림을 보면서 그리면 자꾸만 색감, 구도 등을 생각하게 되니까 그냥 보지 말고 그려보자. 눈을 감고 아무 물감이나 골라서 발라보기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떠서 내 그림이 어떤 지 확인하기도 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고, 붓을 놓기가 어려웠다.
그러고도 안되자, 평소엔 사용해 본 적 없는 재료들을 사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금세 새로운 재료에 익숙해졌고, 손에 익은 감각이 배어 나와 또 입시 그림이 그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려진 그림을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
'아 정말, 그놈의 입시 미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렇게나 그리고 말겠다. 붓을 망가뜨리듯이 종이 위에 문지르고, 그리다가 짜증 나서 붓을 던지기도 했다. 종이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물을 부어버리고, 종이를 찢기도 하고, 혹사시키듯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다 보니 내 손으로 그렸다고 보기 어려운 새로운 그림들이 나왔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지금 맞는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슨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린 그림이 드로잉북 2권, 총 160장을 넘어갔다.
※ 이때 그렸던 그림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괴물을 키운다'의 중간중간에 알차게 사용되었다.
너 정말 재능 있구나!
1차 평가 때처럼 바닥에 그림을 쭉 깔아놓고 여러 학생들을 한 번에 평가하는 것이 아닌, 2차 평가는 예정된 시간에 한 명씩 교수님께 찾아가 평가를 받았다. 4시가 나의 예정된 평가 시간이라, 드로잉북 2권을 품에 안고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앞 학생들의 평가 시간이 점차 뒤로 밀려, 4시 반이 넘어서야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덤덤하게 인사를 드렸고, 교수님이 내게 손을 뻗자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드로잉북을 건네드렸다. 어떤 사람은 평가를 40분 듣고, 어떤 사람은 10분도 안 걸렸다고 하던데, 교수님이 이번에도 내 그림에 하고 싶은 말이 없으시면 어쩌지. 어쩌면 내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건 아닐까?
'예고 나왔어?'
드로잉북을 이리저리 펼쳐보시더니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던지셨다. 순간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한민국 입시가 어쩌고, 예고가 어쩌고 그렇게 말씀하시던 교수님이 아니던가. 짧게 '아뇨'라고 말하자, 기막히다는 듯이 웃으셨다.
'인문계? 와... 너 정말 회화적인 재능이 있다. 난 이 정도면 성공한 거라고 봐. 표현방식이 다양하고 재밌고 회화적이야. 이건 진짜 마음에 든다, 이것도 재밌고.'
다시 한번 드로잉북을 천천히 훑어보시더니, 몇 장은 사진을 찍으셨다. 드로잉북에 시선을 떼고 교수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작가 해볼 생각은 없니? 재능 있는 것 같아. 네 나름대로의 그리는 방식도 찾은 것 같고, 드로잉들 표현한 게 전체적으로 다 좋아. 정말 잘 봤어. 인문계 고등학교 나온 데다가 2권 만에 이렇게 그린다는 건, 내가 보기엔 넌 회화적인 재능이 있다.'
듣고 싶었던 인정보다 더 극찬을 받고 있는데, 지금 내 마음에 드는 이 감정들은 뭘까? '재미없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데도 벙쪘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 감사합니다.'
'근데 네가 뭘 얘기하고 싶은 지에 대해선 잘 안 보여. 표현은 괜찮으니까 이제 내용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네 그림들을 더 봐야 할 것 같아. 2학기에도 드로잉 수업 들어봐, 알겠지?'
'감사합니다', '네'를 반복하고 교수님의 질문들에 더 대답을 하다 보니 평가가 그렇게 끝났다. 문을 닫고 나서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의 소용돌이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회화적인 재능이 있어, 작가 해볼 생각은 없니?'의 문장이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재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뜨뜻미지근했다. '회화적인 재능이 있다'는 말은 어쩌면 교수님께 들을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이었는데도, 기쁘기보단 의외로 소름이 돋았다.
듣고 싶은 말을 듣고 나서야,
그게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 회화적인 재능을 인정받으면, 그다음 단계는 뭘까?
미대에 입학하는 것을 꿈꿨으니, 자연히 난 작가가 되는 꿈을 꾸게 될까?
엄마가 '넌 그림이 좋아? 그럼 미술로 가'라고 했을 때, 그게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걸까?
작가가 되기 위해 밟아가는 대학, 대학원, 어쩌면 유학까지.. 부모님은 나를 언제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
꼬질꼬질한 드로잉북 2권을 품에 안고 잠깐의 꿈을 꾸다, 머뭇거리며 실기실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