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의 꽃, 베르사유 궁전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프랑스 최고의 성

by 빠리누나

파리에 살고 있는 나에게 베르사유는 너무 익숙한

단어이고, 셀 수도 힘들 만큼 자주 다녀온 곳이다.

내가 고성을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은 베르사유를 먼저 얘기하고는 했는데, 왜인지 나는

나의 고성대장의 꿈에 베르사유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특별한 고성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베르사유의 시작

베르사유지역은 원래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터였다. 루이 13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루이 14세가 5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와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 마자랭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귀족들의 반란(프롱드의 난)으로 어린 루이 14세는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고, 누구보다 안정적인 보금자리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 같다.

보르비꽁트 성

루이 14세가 본격적으로 친정을 하며 왕권을 강화할 무렵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푸케가

자신의 보르비콩트 성에서 파티를 개최한다.

베르사유가 건설되기 이전의 시점이라, 자신의 궁전보다 아름다운 성을 소유한 니콜라푸케 에게

진노한 루이 14세가 파티를 채 마치지도 않고 파리로 돌아갔고, 그 후로 니콜라푸케가 프랑스에서 영구추방된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처음 베르사유를 소개할 때 나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고 흥미로운 사실만 뽑아 얘기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베르사유가 생기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흥미를 유도하기에 아주 좋은 도입부가 되어준다.

니콜라 푸케

집들이 한번 잘못했다가 영구추방당한 니콜라푸케가 영구추방 전에 감옥에 갇혔던 곳은

앙부아즈 성이다.


역사적 기록상 그는, 루이 14세에게 위협될 만한

정적이었고, 늘 눈엣가시였던 니콜라푸케를 제거한 뒤, 왕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더욱 화려한

궁전이 필요했던 루이 14세는 자신의 아버지의 사냥용 별장터였던 베르사유 지역을 선택하여

오롯이 자신을 위한 궁전을 짓게 하였다.


루이 14세의 파라다이스

베르사유의 황금문

베르사유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궁전에 가까워지면서 위풍당당하게 빛나고 있는 황금문을

본 것을 기억할 것이다.


베르사유 건축당시 10만여 장의 금박을 두드려 궁전을 장식했다고 하는데 현대의 복원과정에서 각종 페인팅과 도금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이전의 고성들을 얘기하면서, 유럽의 성주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물에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자주 얘기하는데, 이 황금문에서도 그러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맨 꼭대기 왕관형상 및에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곡선장식은 루이를 뜻하는 알파벳 L을 두 개 겹쳐놓은 것이고, 그 밑에 태양 속 얼굴은 루이 14세의 유년기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가의 상징인 백합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 황금 문장식을 볼 때마다

내 거! 내 거! 내 거!라고 루이 14세가 소리치는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을 틀에 넣다

겨울의 베르사유 궁전 정원

베르사유 궁전은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획일화되고,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정원은 루이 14세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상징하고

궁전자체는 인간에 대한 통치를 상징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틀 안에 있기 원했던 루이 14세는

자연조차 자신의 틀에 넣길원해 모든 가로수를 네모나게 조경하도록 명하였고, 그 독특한 모습이 오늘날 파리와 프랑스의 독특한 가로수 모양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프랑스 문화의 근간이 대부분 루이 14세로부터 시작된 것이 많다.

그가 패션과 장식에 관심이 많아 오늘날의 명품브랜드들의 성장에 시작이 되었다거나.

자신이 보고 있지 않을 때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생활하기를 바라서 에티켓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식 식사법을 만든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태양왕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천정화

자신을 태양왕이라 스스로 칭하였던 루이 14세는

왕의거주공 간의 방이름 들도 모두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따왔고, 방의 이름에 따라 그에 맞는 신화 속 장면의 천장화를 그렸다.

부르봉왕가의 시절을 지나 혁명 이후 루이필립시기에 박물관으로 개편되어 대중에게 공개된 이후로, 각방들은 테마에 맞게 가구등 장식품들이 복원되어 당시의 화려했던 궁정생활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베르사유를 갈 때마다 많은 변화와 혁명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화려한데

당시에는 얼마나 더 화려하고 눈부셨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거울의 방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조각거울로 이뤄진 17개의 거울의 벽이 마주하여. 73m 길이의 초대형 갤러리를 이루고 있는 거울의 방은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써의 자신의 위엄을 가장 잘 표현한 공간이다.


거울의방을 들어가기전에 있는 전쟁의 방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루이 14세는 그들을 전쟁의 방에서 대기하게 한 후, 자신이 정한 시간에

거울의 방의 문을 열어 입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거울은 보석만큼이나 귀중한 것이었기에

거대한 거울의 방이 베르사유에 있다는 사실은

외국 사신들을 들뜨게 하였다고 한다.


전쟁의 방 또한 거울로 장식된 벽이 있었는데,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신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거울장식에 실망하기도 하였다고도 전해진다.


마침내, 루이 14세의 부름에 거울의 방의 문이 열리고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거울에 반사되며 중앙의 샹들리에를 더욱 마법처럼 빛나게 하는 황홀한 모습에 모든 이들이 태양왕의 위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고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르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루이 16세가 파리로 옮겨 온 후로 베르사유 궁전은 방치되었다.

베르사유 자체가 가지는 권력의 상징성 때문에

나폴레옹 1세가 이곳에 거주하길 원했지만 막대한 수리비로 인해 일부공간만 보수해 별장처럼 머물렀다.

그 후 루이 18세나 샤를 10세 역시 수리비문제로 파리왕궁에만 머물렀기에 베르사유 궁전은 오랫동안 비어있다가 루이 필립에 의해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

1919년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 강화 회의가 베르사유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열리면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합동회의

오늘날, 상원과 하원으로 나눠진 프랑스 의회는 각각 뤽상부르궁전(상원)과 부르봉 궁전(하원)에서 의정활동을 진행하는데, 헌법개정이나 대통령연설등 상하의원이 한자리에 모여야 할 때 베르사유 궁전에 모인다.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정점에서 탄생한

베르사유 궁전은 다른 고성들처럼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고, 누구보다 혁신적이며 변화의 흐름에 앞장서고 있다.

정치적 역사적 상징의 건물의 기능은 물론이고,

프랑스의 문화와 삶 속에서도 베르사유는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는 올해 2024년에 유난히 베르사유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베르사유 야간개장 쇼 (여름성수기 한정)

친구의 초대로 참여할 수 있었던 베르사유의 야간개장쇼는 늘 비슷한 모습의 베르사유를 보았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베르사유 야간개장

올여름 개최된 파리올림픽에서 베르사유가 근대 5종경기와 승마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올림픽당시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장기대한던 종목이 베르사유에서 열리는 승마대회라는 답을 들으면서 나도, 일부러 경기를 더 찾아보게 되었다.

베르사유의 특별전시

현재는 기마와 기사단에 관한 특별전시를 개최하면서 더욱 다채로운 전시를 볼 수 있는데,

지난주에 방문했을 때는

파리올림픽 개막식 때 용맹하게 센강을 달리던

제우스가 새롭게 중앙뜰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리에서 가까워서 그만큼 자주 갈 수 있었고

다른 곳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베르사유궁전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1년 회원권을 신청하고 오면서

시간 있을 때마다 더 많이 더 자세히 베르사유를

공부해야겠다 다짐했다.

베르사유가 간직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이 한 편의 브런치글로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나의 파리생활에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와줄 베르사유의 모습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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