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The medium is the message.” (Marshall McLuhan)
"Hey Google"이라 부르면 몇 개의 디바이스들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지난 9월 OepnAI는 "즉시 결제"(Instant Checkout) 기능을 발표했다.
결제 인프라는 스트라이프(Stripe)가 담당하기로 했고,
한 달 뒤에는 월마트(Walmart)가 합세했다.
이젠 ChatGPT와 대화하면서 물건을 바로 결제하고 월마트는 이를 고객에게 배송해 준다.
주간 활성 이용자(WAU) 8억 명을 대상으로 OpenAI가 직접 매대를 깐 것이다.
AI가 상거래(Commerce)의 인터페이스까지 가져가려 한다.
검색과 결제 사이의 틈을 대화로 이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전쟁의 뿌리는 깊다. 서막은 약 20년 전 IBM이었다.
IBM은 2006년부터 DeepQA라는 자연어 질의응답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2011년 2월, 제퍼디쇼(Jeopardy)에 IBM 창업자 왓슨(Watson) 이름으로 출연했다.
“1904년 평행봉 금메달리스트 조지 에이서의 신체적 특이점은?"
"정답! 그는 한쪽 다리가 없었다.”
컴퓨터가 말을 알아듣고 스스로 퀴즈를 푼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왓슨은 제퍼디 챔피언들을 물리치고 대중적 인지도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문제는 용도였다.
컴퓨터가 말을 알아듣자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서로 먼저 써보겠다고 했다.
시행착오 끝에 IBM은 헬스케어(Healthcare)에 베팅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기술은 눈부셨지만, 비즈니스는 따라오지 못했다.
한편 2010년 2월, SRI의 CALO프로젝트에서 파생된 기업이 시리(Siri)라는 앱을 출시했다.
이를 본 애플은 두 달 만에 이 신생 스타트업을 약 2억 달러에 인수하였고
2011년 10월, 아이폰 4S의 iOS에 전격 탑재하여 시리를 발표하였다.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 장악한 인류의 손에 AI비서를 쥐어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시리에게 날씨를 묻고, 그날의 야구 스코어를 확인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은 이 기술을 언제, 어떤 용도로 쓸지 길을 찾지 못했다.
신기함은 습관을 만들지 못했다.
2014년, 아마존은 알렉사(Alexa)와 에코(Echo)를 선보였다.
유통회사지만 음성 인터페이스를 잡아 주문단을 꿰려 했던 승부수였다.
그렇게 아마존이 음성 인터페이스를 잡게 되면
과거 구글이 뱉어주던 검색 결과와 그 순서에 따른 자리값(광고)은 사라진다.
검색 결과 수십 개를 나열해서 보여주던 구글과는 달리
에코가 '골라' 말로 대답해 주는 상위 몇 개에만 힘이 실린다.
결국 인터페이스를 잡는 자가 대답을 고를 수 있고
그 대답에 끼고 싶은 다른 회사들은 아마존 앞에 줄 설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고 질서는 바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알렉사에게 타이머를 세팅하거나 음악을 틀어달라고 말했지만
에코로 시리얼이나 청바지를 주문하지는 않았다.
구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를 개발하여 반격에 나섰다.
2018년 1월, CES의 라스베이거스는 전시장 곳곳의 전광판과 모노레일까지
도시 전체가 "Hey Google"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안드로이드폰은 물론이고, 구글홈 스피커, 그리고 제휴된 IoT 기기들은
"Hey Google"을 부르는 것만으로 구글 유니버스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도 파도에 올라탔다.
SKT 누구, KT 기가지니, 카카오 미니와 네이버의 클로바까지.
기업들은 거의 공짜로 스마트 스피커들을 온 나라에 뿌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집집마다 스마트 스피커를 한두 개쯤은 가지게 되었지만
공들였던 AI 비서들은 방전된 채 집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었다.
공급자들의 이득은 분명했지만 고객이 체감하는 이득은 약했다.
쓰나미인줄 알았으나, 다시 한번 잔 파도가 되어 물러났다.
7년이 지난 지금, OpenAI가 판을 다시 깔고 있다.
처음엔 묻고 답하는 '검색'을 자연어로 야금야금 갉아먹더니,
그 뒤엔 문서, 이미지, 동영상, 음악까지 인간의 지식노동을 대신했다가,
이제는 월마트에서 대신 장까지 봐주겠다는 것이다.
커머스의 인터페이스를 장악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커머스는 돈의 흐름이다.
예전엔 내 시간을 잡아먹으며 실질적인 일에 도움을 주었다면
이제는 내 지갑에서 돈을 빼가서 실제적인 물건을 사다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직접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게 되고
그 수고를 덜어 준 대가로 음성 인터페이스에 제어권을 건넨다.
그리고 그 제어권은 인터페이스의 막강한 권력이 된다.
먹이 사슬의 주도권은 조용히 기울게 된다.
월마트가 그걸 모르고 OpenAI와 손을 잡았을까? 알았을 것이다.
뻔히 알지만, 알면서도 파도에 올라타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아마존에게 밀리는 판이니 생존이 먼저다.
오늘은 살아남기 위해 OpenAI의 입구에서 손을 흔들고
내일은 경쟁을 위해 자기 입구를 따로 만들 궁리를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파트너십의 실체다.
경쟁은 결국 살아남는 이들 간의 싸움이다.
이건 단지 그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이 승부의 심판은 소비자,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장 제어권을 내주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가격을 비교하고, 리뷰를 흝어보고, 찜하고, 구매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재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재미는 시들해지고, 귀찮아지고, 그래서 편리함이 이기는 날이 온다.
그때를 기다리고 버티는 자가 이긴다.
'애플도, 아마존도, 구글도 하지 못한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어?' 싶지만
앞으로의 십 년은 지난 십 년과 같지 않다.
그들이 시도해 온 터전 위에 단단하게 올려진 십 년이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도 초침의 속도가 다르다.
몇 년 전 OpenAI 이사회가 샘 알트만을 해고했다가 며칠 만에 다시 번복했다.
그 일의 배후에는 철학의 충돌이 있었다.
'공익이 먼저인가, 생존이 먼저인가?'
당시 그들의 철학적 고민과 번뇌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음성 인터페이스를 잡는 자가 우리의 선택을 설계하고
우리의 선택을 대신해 주는 자가 힘을 가진다.
'우리는 누구에게 어디까지 우리의 선택을 위임할 것인가?'
인류에 도움이 되는 마지 노선을 곰곰이 고민해야 한다.
GPT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의 두뇌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