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You can pretend to care, but you can’t pretend to show up." (George L. Bell)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MIT에서 MBA를 마치고 돌아온 지 2년 반이 지났을 때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겨울, 함께 공부했던 일본 친구들 7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름하여 Sloan Fellows 2011 Asian Reunion.
그 간 서로 만났던 친구들도 있었고 졸업 후 처음 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얼굴을 보는 순간 우리는 Boston 시절로 금세 돌아갔다.
한국의 핫플들을 함께 둘러보기도 하고, 저녁은 놀부 부대찌개에 가서 먹기로 했다.
늘 한정식 같은 비싼 정찬만 먹었는데 그날은 조금 더 로컬스럽고 일상적인 음식을 나누고 싶었다.
친구들은 부대찌개의 맛에 감탄했고 손님들이 주황색 앞치마를 두르는 것도 신기해했다.
소주도 한잔 하면서 옛 추억도 이야기하고, 또 요즘은 어떤지 이야기도 하고...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이번 미팅을 처음 제안해 주었던 한 일본 친구가 말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 준 Jimmy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난 살짝 당황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지난 2월 제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올해가 가기 전에 꼭 Reunion을 하자고 Jimmy와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친구들을 설득해서 오늘 모임이 만들어졌어요.
다들 바쁘실 텐데 모임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한국에서 이런 멋진 모임을 Host해준 Jimmy에게 진심 감사를 전합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실 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올해가 가기 전에"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 친구들을 설득하고 내게 연락을 해서 겨울에 결국 한국을 방문한 거였다.
그날 참석한 친구들 중에는 그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오후 비행기로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가
그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다시 일본에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람들을 설득해 쉽지 않은 약속을 지켜낸 그 친구가 너무 대단해 보였다.
반대로 약속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내가 너무 창피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이후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런 공수표를 날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암암리에 서로 이해해 줄거라 치부해 버리고
내가 뱉은 말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이...
다시는 스스로 창피한 사람이 되지 말자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살면서 "한 번 뵈어요"라는 말은 계속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말을 했던 분들을 한 곳에 모아 적어 둔다는 것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틈틈이 그 걸 보면서 시간이 되는 때 계속 만나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빈 말을 줄이려고 애써 노력한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중인 것이다.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동문 점심 모임에 나갔다.
오랫동안 그 모임을 주선하고 이끌어 나가는 동기 친구가 너무 대단해서
언제 한번 나도 나갈게... 했었는데 그 말이 계속 걸렸었다.
그래서 한번 시간을 맞춰 그 모임에 나갔고 여러 선후배님들을 만나 인사를 하게 되었다.
대부분 처음 본 얼굴들이었지만 동문이라는 건 그냥 그 자체로 따뜻했다.
나중에 그 걸 보고 한 친구가 말했다.
"너 명함도 없이 그런 모임도 잘 나가네..."
사실 불편했다.
처음 만날 때 명함만큼 간단히 자기소개를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명함 없이 소개를 하면 뭔가 구구절절해진다.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리면 너무 성의 없거나 자신감 없어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리 불편하고 어색해도
한번 보자고 했던 사람을 보는 게 더 중요했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언제 한번 뵈어요" 했던 많은 분들을 만났다.
평소에 존경하던 형님들도 만나고,
늘 마음의 빚처럼 남아있던 스타트업 대표님들도 만나고,
십수년만에 온라인으로만 한번 보자 보자 했던 중고등학교 동창도 만나고,
직접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모임에서 알게 된 훌륭한 분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 분들을 뵐 때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입장의 여러 고민들을 들을 수 있어서 도전이 되고
늘 돌아오는 길에는 재충전이 됨을 느낀다.
삶의 매 순간 늘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그날 어렵게 친구들을 모아 한국을 방문했던 그 일본친구처럼
잠들었던 나를 흔들어 깨우는 종소리와 같이 고마운 존재들도 만나게 된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쉬이 공수표를 날리지 않고 한번 뱉은 말은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 친구처럼 나도 주변 사랑하는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