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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유영을 마치다.

by 정진우

나는 오늘 밤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싱가포르에 사는 나에게는 한국은 고향이지만 1년 동안은 철저하게 타지였다. 이 나라를 왔던 것도 벌써 1년이 넘은 이야기이다. 취업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의식하며 비행기에 올랐었다. 모든 것이 불안해서 그 불안함에 취해버려 나의 무언가가 무뎌진 느낌이었다.


면접을 열심히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붙은 곳이 생겼다. 사실 조건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지만, 불안에 눈이 가려진 나에게는 조건이 좋고, 나쁘고를 저울질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해외에서 첫 독립과 첫 취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나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잘하지 못하는 영어와 처음 해보는 업무로 인해 긴장의 끈은 끊어질 듯 말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내가 고달프고, 쓴 맛을 느꼈기에 지나가다 만나는 우연함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매일 새로운 장소를 혼자 돌아다녔다. 나는 당연하게 빛을 내어주는 햇빛에 매번 감동을 느꼈으며, 가끔씩 찾아오는 바람에게는 뚜렷한 고마움을 느끼었다. 나뭇가지가 햇빛에 광합성을 하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을 볼 때면, 나무도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어쩌다 외국인과 대화를 하게 되고 친해지게 될 때면 마음속에 새로운 종류의 희열이 느껴졌다. 긴장의 끈이 당겨졌다 늘어나기를 반복하는 내 일상에는 생동감이 생겨갔으며 점점 채도가 높아져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직장에서는 영어와 더불어 중국어도 사용을 많이 했다. 영어도 겨우 따라가는 나에게는 중국어란 참 절망적인 장벽으로 느껴졌다. 그런 벽 때문에 직원들의 대화에 스며들며 친해지는 것은 처음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일을 배울 때는 정말 쉬워 보이는 일도 나는 너무 어려웠다. 그러면서 나는 무언가를 배울 때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인간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걸 깨닫고는 ‘그래 나 못해’라고 툭 던지듯이 생각하고, 얼른 계속 그 일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사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초기에는 출근 하루하루와 근무하는 매 순간이 참 무서웠다. 하루를 겨우 버텨내어도 쉼 없이 찾아오는 다음 날은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일 뿐만이 아니었다. 면접을 보러 다닐 때는 집도 같이 보러 다녔다. 한국에서도 집을 보러 다녀본 적이 없는데 외국에서 집을 보러 다닌다는 것은 정말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렇게 얻은 나의 ‘방 한 칸’은 나의 것을 만들기 위한 값이 얼마나 비싼지 체감을 하게 해 주었다. 그 이후에도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집 냉장고는 스스로 음식들을 채워놓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저 비어있을 뿐이었다.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해 먹는다는 것은 나와는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반대로 빨래는 충실하게 스스로를 늘려갔다. 잠깐만 지나도 빨래는 어느새 자신의 몸집을 키워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참 부담스러웠다. 그 외에도 집, 회사, 비자, 은행 등의 문제들은 싱가포르에 온 순간부터 출국하는 오늘까지 정말 끊임없이 몰려왔다.


사실 일하다 쉬는 시간에 맞는 햇빛과 바람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고독한가를 상기시켜 주는 듯했다. 공원에서 한숨 돌리며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던 나는 어쩐지 눈물이 차올랐다. 어느 날은 출근길에 우연히 보게 된 한 가족이 있었다. 집 앞 수영장에서 평화롭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들 뒤로는 햇빛이 비추어 그들의 몸동작 사이사이에 찬란한 대비를 만들었다. 정말 따사로운 장면이었지만, 어쩐지 너무나도 빠르고 차가운 나의 발걸음 때문에 그 장면 한 구석에는 음영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고독했다. 일상은 매일 새로웠고, 바빴지만 혼자였던 나는 홀로 서 있는 느낌이 고독하기도, 때로는 자유롭기도 했다. 사실 너무 자유로웠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겠다. 어떤 구애와 시선도 받지 않는 느낌은 나에게 새로운 편안함을 선사했다. 원래 나의 세계가 아닌 곳에 있다고 느끼며, 사실 나는 철저한 외방인이라는 내면 속의 인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유로운 고독은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리저리 흔들거리다가도 결국 내가 집중할 곳은 나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의지했던 사람들이 없어지니까, 의지할 곳이라고는 나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끌리는 대로 글을 써보기도 했다. 되도록이면 솔직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안은채, 마음속에 쌓인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짧은 1년이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관계들이 싹트고 저물었으며 그중 일부는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관계도 있다. 처음에 일하기 시작할 때는 직원들에게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언어 때문에 입조차 열기 어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일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 때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를 스스로 매일 날리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예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융화되었다. 나에게 모질게 굴던 사람에게도 나는 내가 마음을 열면 분명 이 사람도 나를 안 좋아하고는 못 배길 거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잘해주기 시작했다. 더불어 영어를 모르는 중국인 직원들과도 어설프지만 활발하게 대화를 했다. 그리고 매일 그들과 새로운 음식들을 먹으러 다녔다. 낯설지만 그런 새로운 자극들은 나의 뇌와 신경을 깨어있게 했다. 덕분에 직원들과 나는 서로 ‘누나’, ‘오빠’, ‘할아버지’,... 등등 애칭으로 부르며 짧은 1년 안에 이렇게 각별해질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친구들은 흔치 않았기에 한 명 한 명이 특별했다. 영어만 쓰다가 한국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자주 가던 바닷가, 맥도날드, 잔디밭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


나의 일상이 너무 빼곡해서 굴리는 것이 매일 힘겨웠지만, 동시에 행복했고, 너무 자유로웠다. 그래서 원래는 1년이 다 채워질 때쯤에 1년 더 싱가포르에 머물까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분명 1년 더 머문다면, 지금보다도 더 성장하고 배우며 새로운 추억도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가야겠다는 어떤 ‘느낌’을 느꼈다. 사실 싱가포르에 오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느낌’ 때문이었다. 왜 가고 싶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 프로그램을 듣자마자 ‘ 아, 이건 가야겠구나.’라는 느낌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끼고 가겠다고 결정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올해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느낌이 느껴진다. 1년 더 머문다고 상상하면,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드니까 말이다. 이 느낌을 언제까지 맹신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느낌’이라는 녀석은 나에게 거짓말을 못 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번에도 한번 따라보기로 했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도 많다. 처음 집에 왔을 때 반갑다고 과일을 선물로 줬던 옆방에 ‘마틴’, 커피 캐릭터 티셔츠를 사다가 인터뷰를 하고 친해졌던 ‘팻’, 일하면서 매일 새로운 음식을 함께 먹었던 ‘스티븐’, 그리고 누구보다 정이 넘치던 동료들, 오차드에서 만난 ’ 셀레스트‘, 반가운 한국어를 내뱉을 수 있었던 한국인 친구들, 위스키를 쐈던 회사 보스, 스몰토크에서 시작해 일자리 제안까지 받았던 한국 미용실에 디자이너님, 일본에서 간식을 보낸 친구네,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여행 왔던 친구, 얘기하느라 밤을 새웠던 맥도날드, 첫 번째 아지트였던 바닷가, 요즘 아지트인 잔디밭, 퇴사를 앞두고 매일매일 싸웠던 회사 HR,... 등등 모아두고 바라보니 너무 풍성하고 재밌는 이야기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소감이 아닌 단편적인 이야기들도 풀어 봐야겠다.


나는 싱가포르에 머물었던 1년 덕분에 내 색깔을 알게 되었다. 그 색은 생각보다 진하고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2024년을 애정하게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전하며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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