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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Dec 17. 2024

틈을 내서 쓰는 사람

백일백장 글쓰기 100일째

반복되는 날 속에서 반복되는 생각, 반복되는 움직임을 반복하며 반복하는 날들을 반복해 왔다.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없고 그 자리에 반복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다른 날의 시작만 있었을 뿐, 같은 날의 반복은 하루도 없었다. 그저 나의 지루한 삶에 대해 누군가의 공감을 구걸하는 말버릇이 고정된 생각을 불러온 것에 불과했다.

검고 깨끗한 아스팔트 위에 굴러가는 은박 껌종이가 보였다. 대여섯 장의 은박 껌 종이는 군데군데 접힌 채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꼭 금속 조각을 닮아있었다. 타이어를 조심하느라 피하던 운전석에서 잔잔한 바람에도 굴러가는 그것을 보고 좀 허탈했다. 옆좌석에 놓인 새로 산 가방 안에 문제가 좀 생겼다. 정확히 말해, 문제가 생긴 건 가방이 아니라 그 안의 물병이었다. 운동 후에 마시려고 이른 아침 정수기 물을 담고 라임 한 조각을 썰어 넣은 물병이다. 병 속 압력이 문제였는지 마개의 잠금장치가 제멋대로 풀려 버렸다. 새 가방은 그렇게 물병과 함께 울어버렸다. 아끼는 펭귄 클래식이 덩달아 엉엉 울었다. 다채로운 하루가 지루한 반복으로 느껴진 것은 시선의 책임이었다. 지긋지긋한 반복과 사소한 순간에서 어떤 누군가는 보석을 캔다.


하루를 어떻게 규정하고, 나를 어떻게 말하고, 나에 대해 어떻게 밝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시를 좋아하면 시를 쓰고, 글을 좋아하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100일의 시간을 통과하며 읽기를 좋아하던 마음은 쓰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옮겨갔다.

쓰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찾아온 뜻밖의 이득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잡념으로부터 쩔쩔매던 자아를 구하는 일이었다. 글감을 고른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고르는 것과 같았다. 질병의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느닷없이 찾아오는 두려움, 저조한 에너지, 화풀이 상대를 찾아 전화번호 리스트를 쓸어내리던 일련의 부정 에너지의 흐름은 쓰기와 만나 맥을 못 추게 되었다. 긍정 에너지에 밥을 줄수록 삶의 시간은 긍정으로 채워지는 게 당연했다. 열린 가슴으로 들어주는 백지가 매일 나를 깨끗한 백지로 만들었다. 백지에 적히는 까만 글자의 힘은 대단했다. 흔들리고 끌려가는 나를 꼭 붙잡아 중심에 바로 세웠다. 삶의 중심에 계속 나를 돌려놓았다.


매일 글을 발행하며 글 쓰는 몸만들기에 집중하느라 충분한 퇴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발행을 해버린 경험이 많음을 고백한다. 초고 같은 글을 접하는 독자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자주 찾아왔지만 계속 써나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완전하고 완벽한 글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위하기도 했고, 다 쏟아부었다고 단정하며 자아도취 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며 내 글의 현주소를 실감하는 일은 꽤 자주 일어났다. 잘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거의 다 쓴 글을 백지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잦았다. 더 나아갈 힘이 나지 않고,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았다. 궁여지책으로 쓴 글에도 너그러운 이웃 작가님들의 라이킷과 격려의 댓글은 지속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으면 마음의 짐은 좀 가벼워진다. 당일 23:59 안에 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니 연습처럼 쓴 글도 발행이 되어야 했다. 매일의 졸필도 연습을 통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쓰는 자의 첫 번째 미덕이 성실함이라면, 두 번째 미덕은 부끄러움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김겨울>


아낌없이 쏟아부었다고 생각한 글도 다음 날이면 부끄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이건 아무래도 글 쓰는 이들의 공통된 믿음인 것 같다. 단골손님으로 찾아오는 자기 검열을 과감히 물리치고 당당하게 부끄럼 없이 스스로의 글을 대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는 있으려나. 박완서 소설가도 첫 작품 '나목'을 다시 읽으며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 시절 내가 최선으로 생산한 글은 그 시절의 나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무가치할 수는 없다.


한때는 수식어가 없는 삶을 비관하기도 했다. 주부라는 직업이 자랑스럽지 않은 날도 있었다. 남의 시선에서 멋지고 나잘란을 연기하고 싶은 로망을 품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시선의 방향을 안으로 돌려본다. 글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면 그걸로 족하지 않나 싶다. 수식어의 규정에서 벗어나니 일상 속에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진입장벽이 높은 것 중 하나가 독서이고, 독서의 한 수 위가 글쓰기라고 한다. 어렵게 진입한 만큼 틈을 내서 매일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소망이 있다. 충분히 사유하고 깊이 고찰한 글을 내놓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2024년 한 해 브런치를 알게 되고 백일 간의 글쓰기를 완주했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성취가 내게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내년의 글쓰기가 향수처럼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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