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소리 Dec 14. 2024

마트에서

한없이 늑장을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밤새 온수매트에 데워진 침구가 몸에 감기고 말려 나는 한 마리의 누에고치를 자처했다. 대부분 주말 아침에 그랬고 추운 날씨에 더욱 그랬다. 늦잠 대장 딸아이도 일어나서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는 진짜 일어날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숫자를 카운트 다운 하기를 여러 번, 사지의 게으름을 털어내고 날숨과 함께 일어난다. 


사과와 샐러드를 한데 담고 삶은 계란을 곁들이는 것으로 아침을 준비한다. 기분에 따라 두유기에 두유를 안치기도 하지만 오늘은 따뜻한 홍차로 대신했다. 매일 똑같은 아침 메뉴를 앞에 두고 오늘 아침 아이의 얼굴빛이 유난히 어둡다. 요즘 들어 좀 마른 듯한 딸아이가 안타까워 내 위주의 식단만 고집하긴 미안했다. 성장기 아닌가.

"마트 갈까?"

"응. 먹을 게 하나도 없어."


가슴 앞에 카트를 품은 이들이 좁은 통로에서 부딪히고 길을 막으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쟁인다. 카트가 엉겨 진퇴양난의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모른척하고 카트를 미는 통에 외부의 차량 정체는 내부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언감생심 천천히 구경하는 것은 진작 포기하고 목록에 적어온 것들만 재빨리 담아 나가야겠다는 계산이 선다. 동작이 빨라진다. 


첨가제 범벅인 빵종류와 인스턴트 음식 앞에서 딸의 발걸음은 자주 멈추기도 했다. 손에 끌려 건강식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오는 딸의 발이 굼뜨다. 시식코너 앞에서 발이 묶여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아예 식사를 해결할 작정인 것처럼 보인다. 내 것으로 챙겨 오는 분량까지 거절하기는 미안했다. 마지못해 한 입 먹고 엄지를 추켜 세워준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전쟁이라도 난다면 이 상황은 더 이상 어떠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날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밀치고 들어가는 군중 속에 날카로운 눈빛이 서로를 찌른다. 발을 밟히기도 하고 의도와 다른 게 남의 발을 밟기도 한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상대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돌아서는 내내 기분이 찜찜하다. 주말에 장 보는 것은 역시 큰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장을 보는 큰 산을 넘기면 길게 늘어선 계산대 앞에 다다른다. 


일렬로 기다리는 순서에도 기어이 옆에서부터 끼고 드는 이들이 꼭 있다. 내 옆으로 파고드는 이를 애써 모른척했다. 앞렬에 따라 걷는 길에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금세 옆사람은 카트 머리를 들이민다. 정체 속에서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것은 정말 봐줄 수가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사람 뒤로 다른 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내가 줄에 끼어든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이럴 때는 우선 앞만 보고 가는 길밖에 없다. 타이르거나 뒤로 가라는 제스처에 보일 그들의 반응이 쉽게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치는 일을 애초에 차단했다.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 서있다 보면 할 일이 많지 않다. 다른 이들은 뭘 샀나 구경하는 일은 이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곤 했다. 옆으로 끼어들던 이들은 다행히 직원의 제지로 뒤로 물러났고, 나는 좌우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장바구니를 참견했다. 운동복에 늘씬한 미녀는 단단한 근육질의 남자친구와 장을 한가득 본 모양이다. 그들의 카트에는 채소, 베리류의 과일, 살코기와 계란이 가득했다. 그들의 카트는 닭가슴살 팩과 고등어도 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식습관이 건강한 육체를 만들었을 것이라는데 의심이 없었다. 그들 옆으로 다른 계산대에 줄을 서고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카트의 손잡이가 뱃살에 묻혀 그의 배에서 카트가 발사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카트에는 머핀과 케이크류가 여러 박스 층층이 쌓여있었다. 소시지와 햄을 비롯한 각종 육가공품도 빈 공간을 수북이 채우고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문 대식구를 거느린 가장인 것처럼 보였다. 


소비자와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을 비교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다. 음식과 건강의 밀접한 관련이 사람들의 카트 속에서도 일관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돌아본 내 카트가 비교적 건강한 식품으로 채워진 것은 다행이었다. 딸아이는 여전히 입을 삐죽거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딸의 식습관을 위해 나도 양보할 수 없다. 한 끼가 평생의 음식이 되고 내 몸의 뼈와 살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면 잠시의 편리함을 택하는 것은 여전히 거부하고 싶은 일이다. 


장을 보고 왔지만 집은 다시 먹을 것으로 풍성해진 모습과는 멀다.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을 아이는 금세 감지한다. 엄마 손을 거쳐야만 나오는 음식에 아이는 그중 제일 간단한 토마토계란볶음을 주문한다. 손은 더 바쁘고,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그게 대수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