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소리 Dec 08. 2024

여행의 시작

시작이 반, 계획이 반

올 겨울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공이 많아도 의견을 모으기 어렵지만,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고 기간을 정하는데 먼저 나서 계획하는 이가 없다. 남편은 스페인 인접 국가를 가고 싶다고 하고, 나는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을 종단하고 싶다. 결정하지 못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선택권은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최근 북살롱에서 읽은 책이 마침 랜드마크와 세계사를 연결하는 내용이어서 아이는 후보 목록에서 뉴질랜드를 거침없이 제명해 버리고 아빠 쪽에 붙었다. 오케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남스페인과 맞닿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과 카사블랑카를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감명 깊게 본터였다. 이참에 스페인과 모로코의 동선을 묶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상상만 하던 공간이 현실이 되기까지에는 용감한 휴가 신청항공권을 예매하는 일이 우선된다. 이 두 가지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 남아있을 것이기에 미리 설렘이든 설레발이든 자제한다.


MBTI이야기를 한번 해야겠다. 종교처럼 믿는 이가 어찌나 많은지 같이 휩쓸리기 싫어 한번은 생각을 좀 정리할 겸에서다. 기본적으로 MBTI는 '나'라는 사람의 일부를 나타낼 뿐,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누구는 E이고 누구는 I다. E 같은 이가 I이면 그게 깜짝 놀랄 일인가 싶다. I가 E라면 그게 그렇게 눈을 크게 뜰 일인가 싶다. 나의 MBTI를 물으며 잡다한 관련 지식을 내뱉기 위해 준비는 이의 눈빛을 보면 나는 매몰차게 받아친다. 

"매번 달라서요."


"당신이 여행 계획 좀 세워 봐. 당신 F잖아!"

T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 눈 흰자위 벌게지는 중노동을 내게 맡기려 한다. "아니? 난 F는 맞지만 여행 계획은 안 좋아해. 오히려 여행은 가서 부딪치는 맛이지!" F안에 T가 고개를 든다.

T를 핑계 삼아 계획을 면제받고 무임승차하려는 남편이 나의 게으름을 참아내지 못하고 손수 계획을 나섰다. 랩탑에 모니터를 연결하고 식구를 불러앉혀 지도를 보며 엑셀 파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전문 분야다. 



그의 전두 지휘로 나는 숙박, 아이는 갈 곳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길게 낼 수 있는 휴가에 이제부터 뭔가 슬슬 기대가 차오른다. 구글 맵을 켜보니 지리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지고 어떻게 이동할지에 대한 큰 그림이 대강 그려지고 있다.


검색을 하는 와중에 우연히 같은 일정으로 여행사에서 출발하는 패키지 상품을 발견했다. 

'그냥 패키지로 맘 편하게 갔다 와?'

잠깐 흔들리던 마음은 다시 자유여행으로 돌아왔다. 일정을 온전히 다 돌아보지 못하더라도 가기 위해 준비하고, 매 순간 도착한 장소에 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머무르기 위해서는 여행사 대절 차량보다 직접 발품 팔아 움직이는 행동이 필요하다. 한 곳을 보더라도 깊숙이 빠져볼 수 있는 경험이 좋다. 기억이 깊어진다.


계획을 시작한 남편의 마우스 클릭 소리가 몇 시간째 이어진다. 아이는 그 사이 논다고 나갔다. 나는 옆에서 이 글을 쓴다. 항공 스케줄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마다 잠깐 의견을 주고 의견이 합치하면 다음 과정으로 계획은 이어져간다. T도 계획을 잘한다. 계획하는 문제에 있어서 F가 자랑스러울 일도 아니고 T가 쌉T라고 오해받을 이유도 없다. 이쯤 되면 어느 상황에서든 MBTI는 그만 언급하고 싶다. 궁금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아 주길 바란다. 그저 도망가고 싶을 때 빠져나오고 싶은 핑계나 개선하지 않고 게으름 부릴 변명을 만드는 것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MBTI가 사람을 고정된 모습으로 굳게 한다. 


여행은 계획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한 달 반정도 남은 기간을 설렘과 기대로 채우는 일이 프롤로그로 남아있다. 실제로 여행 자체는 기대에 못 미칠지도 모른다. 사진으로 이미 여러 번 봐온 이유이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변수는 늘 무궁무진하게 있기 때문에 조금은 두려운 맘도 있다. 고생을 찾아 나서는 것이 여행의 다른 얼굴이 아니던가. 다녀와서는 '집이 최고야'를 외칠지 모르지만, 가지 않고서는 그조차 무덤덤할 것이다.

엑셀 파일에 색색으로 마크한 일정의 주요 포인트들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빈칸을 채우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식으로 파일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아는 만큼 보기 위해 현재의 아는 것을 업데이트하는 일이 필요하다. 관련 책을 좀 찾아보며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시작한 여정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제 여행이다. 


Bon Voyage!




* MBTI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과 무신경이 알파벳을 바꿔쓰는 문제를 초래했어요. 윗글에 언급한 차이는 F와 T가 아니라 J와 P의 차이라고 하네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냥 찰떡으로 읽어주셨을거라 믿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