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해지는 게 최선일까
새치기는 싫다. 나 바쁜 게 남 바쁜 것보다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나는 소름 끼치게 싫다. 그건 묻고 동의하는 일련의 소통 없이 일어난 행위라서 의뭉하고 기분 나쁘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한 새치기가 당신의 목표에 효과가 있었는지를. 다른 사람의 새치기에 당신도 똑같이 너그러울 수 있는지를.
'경험치'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인생의 경험이 다르기에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수용의 단어. 이 말은 상대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내 행동에 대한 상대의 존중을 기대한다. 이 단어를 알기 전까지 내게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뉜 것이었다. 나, 아니면 적.
그럼 새치기는? 나는 재중 한국인으로서, 새치기를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두 사회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아간다. 왜 누군가는 새치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 다른 누군가는 떳떳하게 저지르는지. 나는 그것을 '경험치'로 인식한다.
무슨 경험?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라는 흔한 말이 있다. 어느 행위로 덕을 본 사람은 계속 그 행위를 지속하려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가 시켜도 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이라는 인구대국에서 한정된 자원은 쟁취의 대상이다. 얻는 자가 있다면 얻지 못하는 자도 반드시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만성 불안이다. 하여, 이들은 도덕이나 질서를 준수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믿지 않는다. 생존이 중요해지면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병원 수납창구에서 내 차례가 되어 일을 보고 있으면, 자꾸 내 옆에 서서 창구 안의 직원에게 자신의 용건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정말 너무나 많다. 내가 직원이라면 "뒤에 가서 서세요." 할 텐데, 내 업무를 봐주면서 그의 입은 그들에게 일일이 대응한다. 질서는 생존을 앞설 수 없다. 새치기는 생존 본능이다. 끼어들지 않으면 내 순서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규칙과 규범도 기대하는 결과가 실현 가능할 때에야 기대할 수 있다.
경험은 행동의 패턴을 정한다. 한 나라의 민족성은 결국 국민의 경험이 만들어 낸 패턴의 결과다. 나는 최근 상하이 푸동공항의 유연한 운영을 보았다. 공항 1층에는 줄을 서서 순서대로 택시에 탑승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하 1층에는 각자 예약한 (디디: 중국형 우버)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1층은 질서 정연했고, 지하 1층은 혼란했다. 질서와 무질서의 공존. 앞에서 중국을 오해했다면, 이젠 오해를 풀 타이밍이다. 이 세상 누군가는 질서를 믿지만, 누군가는 질서를 혐오한다. 이들을 판단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이를 받아들이는 융통성이다.
독감 예방접종을 하러 간 곳에서 내 앞으로 끼어든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다. 나는 이제 옥신각신하지 않는다. 병원은 환자가 얼마나 많든 상관없이 업무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 앞에서 쟁취가 시작되었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던 건 순서가 올 것이라는 한국적 믿음이 있었다.
최근, 한국 젊은이들은 의에 맞지 않는 일이나 누군가의 결례를 보면 '중국화 되었다'는 말로 욕을 대신한다. 국가별, 인종별 경험치를 우리 문명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판단은 마치 칼 같아서 찌르면 아프다. 세계 곳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를 살리는 룰이 누군가에게는 룰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그 많은 사람을 미워했다. 오늘은 왠지, 이들의 행동을 이유 있게 바라보고 궁금해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살 만해질까 싶었다. 그리고 살 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