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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07. 2024

2-7. 라스베이거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사장님, 곧 여름이 다가옵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신제품 생산 승인이 안 나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됩니다. 지난번 다녀가실 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사장님은 제 심정을 헤아려 주실 거라 믿습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김주환 사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곤란함과 귀찮음이 교차하는 모양새였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현 법인장!”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명을 부를 때는 매우 곤란하거나 회사 차원의 공식적인 결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안 그래도 어젯밤 단장한테 보고를 쭉 받았어근데 그 결정이 쉽지 않아특히 공식 문서로 승인을 지시하는 건 나중에 정부와의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길 소지가 다분해현 법인장도 잘 알잖아우리 회사의 입장을나로서도 소관 부서장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하지만 사장님,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 법인의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본사 차원에서는 없어져도 표시 하나 안 날 작은 회사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딸린 식솔이 얼맙니까?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말이야이렇게 하면 어때일단 제품 생산에 불법적인 부분이 없다는 건 확인 됐으니까 법인장 재량으로 생산을 시작해 봐그리고 그걸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고 법인장 편에 서 줄 테니까우리가 한두 해 보아 온 사이도 아니고그 정도는 나를 믿고 한번 밀어붙여 볼 수 있지 않겠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더 말해 봐야 서로가 피곤해질 뿐이다. 결국 진화식이 이 제안을 해 올 때부터 이 문제는 나의 결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10년간 그 누구도 결정하지 않은 일, 결정하면 분명 회사에 도움이 될 걸 알지만 자칫하면 스스로 독배를 마시게 되는 꼴이라는 걸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진화식은 그런 독배를 나에게 들이민 것이다. 나의 성격으로 보아 반드시 마실 거라는 걸 그는 이미 알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결정이 잘못되면 나에게 내려질 처분은 인사상의 불이익이 될 것이다. 그건 국내 복귀가 될 수도 있고 승진이나 다른 인사상 불이익이 될 수도 있다. 그 피해에 비하면 회사를 포기하는 일은 너무나 많은 사람을 궁지로 내모는 일이다. 수십 명의 직원과 그에 딸린 가족들, 그리고 이제 겨우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미국의 거래처들과 한국의 신규 거래처들을 생각하면 나 하나의 안위를 돌볼 명분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진화식을 불렀다.     


“진차장,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다음 주부터 혼합 신제품 생산라인 가동할 거니까 직원들 준비시켜. 그리고 본사에 승인 문서 올렸던 서류들 잘 정리해서 승인이 거절된 사유랑 법인장 재량으로 생산하라는 본사의 구두 지시사항을 기록해서 나한테 결재받고 보관해. 결정은 내가 하지만 분명 본사와의 협의가 있었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라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법인장님근데 승인 문서도 없이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야! 이게 네가 바라던 거 아니야? 어차피 한국 기업을 위한 일이고 한국 소비자를 위한 일이야. 만약 이 문제로 인해 내가 불이익을 받는다면 난 청와대까지라고 찾아가서 따질 거야. 도대체 그놈의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냐고 말이야.”     


“참 진차장, 그리고 이 혼합 신제품 가격 말이야. 내가 볼 때 가격을 올릴 필요 없을 거 같아. 그냥 기존 제품이랑 동일가로 한국에 가격 돌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공격적으로 가자. 미국 놈들이 말도 안 되는 이익을 취하는 꼴 더는 못 보겠다. 그래야 나도 이 결정이 한국의 소비자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걸 증명할 테니까.”     


진화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의 결정은 이 좁은 시장에 순식간에 전파됐다. 그동안 미국 업체로부터 비싸게 제품을 구매하던 업체들이 대거 우리 회사로 몰리면서 생산라인을 24시간 풀가동하고도 수요를 맞춰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쯤 되자 버티던 미국 업체들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모두 가격 인하에 동참했다. 뜻하지 않게 나는 미국 업체들의 공공의 적이 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반응에 안도했다. 이 결과가 결국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마신 잔은 독배가 아니었다. 아니 설령 그것이 독배였을지라도 아직 그 독이 퍼지지는 않았음이 확실했다. 하긴 어떤 독은 세월을 두고 천천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걸 보면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엔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오리건주의 8월은 비가 오지 않는다. 오리건주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 어느 바다도 흉내 낼 수 없는 해안선이다. 수백 킬로가 넘는 태평양의 바다는 그야말로 가는 곳마다 장관을 이룬다. 두 번째는 여름의 햇살이다. 청량한 여름의 선샤인은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그 무엇 하나 섞이지 않는 태양 빛은 오히려 다이아몬드보다 더 찬란하다. 그런 하늘에 갑자기 세찬 비가 내렸다. 그나마 미세하게 쌓여 있던 먼지를 모두 몰고 갔다.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맑은 하늘에 동화의 한 장면처럼 쌍무지개가 찬연히 피어올랐다. 마치 힘든 고비와 결정을 마친 나에게 주는 신의 선물 같았다.     


사업은 다시 순풍에 돛을 달았고 걱정하던 모든 일이 사라졌다. 한국 거래처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손님들이 들이닥쳤고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럴 즈음, 마치 쌍무지개가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중요한 두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 첫 번째 손님은 다름 아닌 우리 그룹의 회장이었다. 4년마다 열리는 관련 분야 세계 포럼이 미국에서 열리게 되면서 사장도, 대표이사도 아닌 회장이 직접 참여한다는 전갈이 왔다. 그리고 미국에 진출해 있던 그룹사의 각 분야 사무소장을 한 자리에서 만나겠다는 계획을 통보해 왔다. 나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회장과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는 건 한국에서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나에겐 승진이라는 명제가 있지 않은가. 나는 모든 채비를 마치고 포럼이 열리는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같은 시각 포럼을 향해 날아오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한국의 메이저 업체인 D사의 이 회장이었다. 지난해 품질 문제로 나를 불러 협박했지만 오해가 풀리면서 오히려 급격하게 친해진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그 후로 혼자 미국을 다녀가면서 어느새 나랑은 형님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그가 거래처 대표로서 회장과 동행한다는 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회장과의 특수한 인연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일개 거래처 대표이면서 나를 강하게 협박했던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었다. 나는 여름 하늘에 찬연하게 떠올랐던 커다란 쌍무지개를 떠올렸다.     




한편 대표이사의 요청으로 주지사가 참석하기로 한 10주년 행사는 차질 없이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자회사인 본사에는 김주환 사장과 송필연 감사국장이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곧 있을 10주년 행사에는 대표이사가 직접 참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표이사는 미국에 오는 김에 시카고와 뉴욕에 있는 대형 거래처를 방문하고 남는 시간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는 전 일정을 나와 함께 하기로 했다. 모든 행사 준비도 끝났고 대표이사와 함께할 모든 여행 일정까지 완벽하게 준비가 끝났다. 나는 마치 산란을 위해 연어가 올라오는 수확의 길목에 서 있는 곰처럼 느긋하게 모든 걸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나는 일개 직원에서 세계의 중심에 서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건 굳이 말하자면 쌍무지개가 아니라 세 쌍무지개 뜬 거나 다름없었다.     




탐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나는 그해에만 벌써 세 번째 라스베이거스를 갔다. 나로서는 그 비싼 돈을 내고 세계적인 명쇼라는 O쇼, KA쇼를 보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다. 관광으로 라스베이거스를 찾은 사람들은 대개 돈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환락의 도시가 풍기는 어떤 기운과 가이드나 현지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마치 그동안의 억눌렀던 소비 욕구를 다 털어내는 듯하다. CASINO에서 주는 무료 맥주 한 병을 마시며 수백 수천 달러를 아낌없이 토해낸다. 심지어는 단 하룻밤 도박에 빠져 가족도 동료도 모두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非一非再’하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나는 과감하게 인간이기를 거부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랜드캐니언 관광은 필수다. 어떻게 보면 가까운 거리에 자연이 만든 지구상 최고의 작품인 그랜드캐니언과 인간이 만든 지구상 가장 탐욕스러운 문명이 공존하는 셈이다. 많게는 수억 년의 자연이 만든 경이를 체험하고 돌아온 많은 사람이 다시금 일확천금을 위해 카지노로 향한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포럼 일정을 마친 회장과 미국 각지에서 온 사무소장들 그리고 동행한 비서진들과 몇몇 거래처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만찬을 마친 후 나는 자연스럽게 D사의 이 회장과 별도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약속한 대로 나는 이 회장을 형님이라 불렀고 그는 나를 아우라고 칭했다. 그러던 그가 나에게 술에 취해 말을 건네왔다.     


“어이, 아우님, 법인장. 너 여기 라스베이거스니까 내가 딜 하나 할까? 이건 라스베이거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이야. 오늘 여길 벗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아니 형님 무슨 말씀이세요술 취하셨어요?”     


“취하기는? 나는 30년 동안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는 술을 토하듯 “꺽”하고 트림을 토해내며 말을 이어갔다.     


“잘 들어. 너 올해 승진하고 싶으면 내가 너 승진시켜 줄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형님이 제 승진이랑 무슨 상관이에요어서 술이나 드세요.”     


“나 장난하는 거 아니다! 너 ‘과유불급 過猶不及’이 뭔 말인 줄 알지? 네가 정찰제 시행하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많이 피해 본 줄 알아? 이제 적당히 좀 하고, 그 제품들 나한테만 좀 싸게 줘, 옛날처럼. 5불씩만 싸게 주면 내가 너 올해 승진시켜 줄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좀 해라. 이 멍청한 놈아! 그런 건 진화식이한테 좀 배워!” 

   

멍청한 놈진화식이한테 배워아니 근데이 인간이!!”     

이전 14화 2-6. 성공이라는 이름의 독배, 마시는 자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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