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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14. 2024

3-1. 실패, 그리고 눈물의 유언장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승진 발표가 있기 바로 전날 밤, 사업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는 나의 유일한 미국인 친구이자 영어 선생님이기도 한 존(John)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And one has to understand that braveness is not the absence of fear but rather the strength to keep on going forward despite the fear.” — Paulo Coelho.     


미국인은 불교와 동양철학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나의 오만을 무참히 짓밟은 존은 가끔 서양 영성가들의 문장을 보내 나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파울루 코엘류.     


존(John)의 문자에서 받은 불길한 계시(Revelation)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국에서 날아든 인사문서의 승진자 명단 어디에도 내 이름 석 자는 없었다. 인사권은 그야말로 잔인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직장인에게 잔인한 달을 꼽으라면 나는 4월이 아니라 인사발표가 나는 달이라고 감히 말할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인사가 얼마나 있겠는가?      


승진을 기대하는 대부분이 승진에서 제외된다. 설령 승진을 했다 치더라도 승진 후의 발령에 희비가 엇갈린다. 심지어는 승진하지 않은 만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승진은 모든 직장인의 가장 큰 로망이자 에너지원이요 직장생활의 꽃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승진에서 몇 번 고배를 마시면 왜 그런지 무능력자가 된다. “열정과 인간의 관계는 스팀과 증기선의 관계와 같다.”라고 나폴레옹 힐이 말한 것처럼, 승진은 직장이라는 증기선의 스팀과 다를 바 없다. 그 스팀이 바르지 않게 쓰이지 않는다면 증기선은 자칫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존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으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래 한 해쯤이야. 나는 이미 미국이라는 큰 사회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법인장으로서 누리는 혜택으로 치면 그 1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더욱 중요한 건 회사 내에서 내가 이루려는 꿈이다. 그 꿈을 향해 가는 데 있어 1년의 기간은 오히려 나를 더 겸손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자.’     





처음 1년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국 현지 업계의 반응이 지난해 우리의 사업 성장을 지켜보면서 한층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현지 미국 업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주지사와의 토론회를 거쳐, 10년 만에 과감하게 신제품 생산을 시작하면서 가격을 선도해 나가자 회사의 위상은 높아만 갔다. 새해에도 사업은 순항을 이어갔다. 돈에 쪼들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회사에 현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현금이 넘쳐난다는 말은 그만큼 쉽게 더 싼 원료를 구매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2년이라는 세월이 회사의 모든 면을 선순환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승진에 실패한 것만 빼면 나로서는 인생 최고의 ‘성공가도成功街道’를 달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기업 경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 하나, 바로 직원들이다. 이 모든 실적과 성공의 주인공은 바로 직원들이다. 직원을 섬기지 못하는 경영자는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기업의 목적은 결코 ‘이익의 극대화’가 되어선 안 된다. 기업도 인간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반드시 그 기업에 관여하는 사람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 그중에 직원들은 최우선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익이 늘어나면서 나는 나의 재량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직원들의 급여를 올려주었다. 그리고 초과 수익에 대해서는 수시로 상여금을 지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직원들에게 의료복지를 확대했고, 신분상 도저히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직원들은 최대한 배려해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었다. 직원들의 사기와 회사에 대한 충성도 역시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근자열, 원자래 近者說, 遠者來” 공자의 가르침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자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미국 업계에서도 회사와 나의 인지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졌고 다양한 업계에서 파트너십을 제안해 왔다. 그런 소문은 업계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새 한인사회에도 퍼져 개인적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미국은 기회의 땅 아닌가? 문제는 영주권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나와 가족을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살게 해 준 회사를 배신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회사라면 그땐 충분히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실지로 주재원으로 나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사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스카우트 제의에 응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회사 내에서 내가 되고자 하는 확고하고도 오랜 꿈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나의 꿈은 이 회사의 대표이사가 되는 것이었다. 금융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내가 십수 년의 기득권과 전문성을 포기하고 이 낯선 사업 분야에 도전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더 멀리 가기 위해 때로는 한발 물러서고, 때로는 돌아가는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해외에서 주재원으로 산다는 것, 그것을 나는 가장의 희생으로 가족을 행복하고 수준 높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주재원 부인은 신이 내린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런 생각에서인지 나는 유독 미국에서 가족에게 소홀했다. 회사 일에 매달리느라 정작 가족들과는 변변한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해 봤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가족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가 위치한 곳은 오리건주에서도 작은 시골이었다. 교육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가족들이 살기에 편리한 도시에 집을 얻은 나는 매일 차를 몰아 왕복 200㎞가 넘는 거리를 출퇴근했다. 주로 이용했던 길은 I-5(Interstate-5)라는 고속도로인데, 이 도로는 북으로는 캐나다로부터 남으로는 멕시코로까지 이어진 총길이 2,222㎞가 되는 미국 서부의 핵심 도로다.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눈 뜨고도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대형트럭의 각축장이다. 이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한다는 건 어찌 보면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어떤 사고나 어떤 위험한 순간에도 나는 죽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생겼다.     


여느 때처럼 여유롭게 출근하던 아침,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오른쪽 옆을 지나던 트럭 한 대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차 앞으로 뒹굴며 순식간에 나의 왼쪽을 주행하던 차를 폭파하듯 들이받았다. 그러자 그 큰 차량 두 대가 마치 장난감이 구르듯 내 앞의 도로를 굴러 도로 가운데 홈으로 쑤셔 박혔다. 두 대의 차량은 단 몇 초 사이에 종이짝처럼 구겨졌고 가까스로 사고를 면한 나는 그 차량의 참혹함을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옆 트럭이 만약 순간의 차이로 나의 승용차 위로 넘어졌다면, 그렇게 내가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내와 세 아이는?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떠난다면···?’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마치 죽음에서 잠시 돌아온 사람처럼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마지막 가는 길, 마지막 그 한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차마 떨쳐 잊지 못할 이름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여!”     


이미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는 두 눈에 눈물이 하나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나의 부재가 아내와 아이들의 삶에 미칠 영향들을 생각하니 점점 눈물이 앞을 가려 화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가족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적어가며 유서를 써 내려갔다. 그래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건만, 유서를 쓰며 떠오르는 건 온통 잘해주지 못한 것과 미안함과 후회만이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자 이내 눈물은 흐느낌이 되었다. 흐느끼는 소리에 놀란 직원들이 번갈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의 동정을 살피고 돌아가곤 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죽음에 이른 사람이 되어 유서를 이어갔다. 가입한 보험과 죽은 후에 회사에 요구할 것들, 아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기는 말을 적었다.     


“나의 시신은 화장해서 꽃피고 새우는 고향 땅, 울 어머니 무덤 곁에 고이 묻어 주기 바란다. 그동안 사랑했다.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만난 것에 더없이 감사하다. 더는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마라.”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그리고 문득 떠오른 깨달음, 이 순간이 언제나 내 삶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것, 아니 이 모든 순간이 언제나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사실. 그 어떤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으며, 그 어떤 만남도 소중하지 않은 만남은 없다는 것. 이제 이 세상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기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언제나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마음도 잠시, 정해진이 들고 온 미(美) 이민국의 서류 한 장은 나를 ‘아연실색 啞然失色’하게 했다.     


“법인장님, 영주권 승인 서류가 왔습니다. 그런데 법인장님 거랑 제 거는 없습니다.”     


“뭐? 정 과장,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진화식 차장만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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