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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21. 2024

3-3. 그 여름 알래스카 그리고 지옥의 계곡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이철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니체가 말한 “교활한 자의 본질”에 대한 구절을 떠올렸다.     


“교활한 사람, 비겁한 사람은 간혹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심오한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복잡하거나 심오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실은 너무도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진화식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언제나 지금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기에 때로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때로는 하이에나처럼 비겁하며, 때로는 뱀처럼 차가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공통점이라면 자기의 이익 앞에서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남 팀장이 나에게 비췄던 우려대로 이철진 팀장은 미국 법인을 본사로 이관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일을 추진하는 자세한 내막은 아직 알 길이 없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그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갈 거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법인장님, 제가 말씀드린 서류 잘 챙겨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회사의 발전을 위하는 일이니 잘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이봐요 이 팀장님, 지금 요구하신 서류들이 정말 회사를 위한 거 맞습니까? 제가 볼 땐 이건 저를 감시하고 문제를 지적하려는 서류로만 보입니다.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알아봐야지 왜 감사가 모두 끝난 내부자료를 요구하는 거지요? 아무리 감사실 출신이라지만 여기는 엄연히 영업 일선입니다. 그리고 지금 요구하시는 서류들은 자회사로 이미 다 보고가 끝난 것들이고요. 정 필요하시면 그쪽에 요구하시고 이쪽에는 실지로 사업발전을 위한 서류만 요구하세요. 아니면 이곳 현장에 한 번 나와서 직접 두 눈으로 보던가!”     


나는 말도 안 되는 요구 자료 목록에 화가 치밀어 큰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아내며 대꾸했다.     


“이것 보세요 법인장님, 이건 제가 임의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 대표이사님 결재를 얻어서 진행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협조가 안 되면 곤란합니다. 대표이사님이 빨리 구체적 계획을 올리라고 해서 이러는 겁니다. 아니, 직원들 시켜서 보내라고 하면 될 것이지 뭘 그리 핑계가 많습니까. 핑계가?”     


뱀처럼 빈정대는 그의 말투에서 마치 역겨운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남 팀장을 통해 이미 그의 의도를 대충은 알고 있던 터였고, 따로 알아본 바로 그는 나보다 예닐곱 살이나 어린 친구였다. 더욱이 그는 감사실에서만 오래 근무해 영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해외 사업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일 아닌가. 결국 나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냈다.     


“뭐라고? 핑계? 아니, 당신 말 다 했어? 아니, 이건 어딜 봐도 사업 추진을 위한 자료가 아니잖아? 감사자료지. 당신이 지금도 감사인 줄 알아? 그리고 서류 필요하면 공식 문서로 시행해서 보내. 이건 기본이 안 됐잖아? 그리고 말하는 예의가 그게 뭐야 지금? 누군 그룹 본사에서 근무 안 해본 줄 알아? 사업은 책상에 앉아서 서류로 하는 게 아니야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하는 거지. 아무튼 난 이 서류 못 주니까 그렇게 알아!”     


나는 불같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나보다 입사도 늦고, 직전 승진도 늦고, 나이도 어렸지만 이미 승진한 상태였기에 어찌 보면 나의 상사였다. 그것도 그룹 본사에 근무하는 쟁쟁한 상사 말이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속으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 인간이 철저히 계산해서 만들어 낸 시나리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런 문제를 공문으로 요구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서 화를 돋웠겠는가?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실수라면 그의 계략에 휘말려 내가 먼저 ‘선전포고 宣傳布告’를 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의 2차 공격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화火’는 늘 ‘화禍’를 부른다.     




본격적인 사업 시즌인 여름이 시작될 즈음에 한국에서 또 한 통의 정말 반갑지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해 라스베이거스에서 나와의 딜(Deal)이 틀어지는 바람에 완전히 원수지간이 된 D사의 이 회장이었다. 토라져서 한국으로 돌아간 그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나를 괴롭혔다. 우리 회사 제품에 민원을 제기하는 건 아주 기본 중에서 기본이었다. 그룹 대표이사와 김주환 사장을 만날 때마다 나를 인신공격하는 건 물론이고 업계에도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며 나를 곤란하게 했다. 그게 자기에게 협조하지 않은 나를 응징하는 그의 힘자랑이었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도 그를 포기했다. 어찌 보면 지난해에 승진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그의 방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지난해 라스베이거스에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인생은 180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왜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나에게 '아우'라고 부르며 친한 척 반말을 하던 그의 말투는 어느덧 다시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이봐요 법인장님, 내가 올해는 우리 회사 임원들을 모시고 알래스카에 갈 예정입니다. 임원들이 모두 제품 품질 문제로 미국 법인에 불만이 많습니다. 시간 되시면 잠깐이라도 와서 임원들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하세요. 안 그러면 거래 관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는 임원들의 핑계를 댔지만 사실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이 제기한 문제였다. 그리고 임원들과 알래스카를 간다는 건, 사업 목적보다는 관광의 목적이 훨씬 크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가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접대하라고 부르는 건가? 아무튼 이참에 만나서 다시금 결판을 지어 보자. 진심은 통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도 사람이라면 나의 진심을 알아주겠지. 그래도 이 사회에 아직 정의는 살아있으리라!’     


지구상 최고의 선샤인이 비춘다는 오리건의 여름 하늘 위로 비행기는 찬란하게 날아올랐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여름 알래스카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 회장과 임원들은 헬기를 타고 도착한 설원에서 마치 아이들처럼 즐거워하며 개썰매를 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으레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알래스카의 밤은 12시에도 어둠이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과 나는 몇 날 밤낮을 함께 했고 우리는 마치 가족이나 된 것처럼 가까워졌다. 이역만리 차가운 땅 알래스카에서 같은 동포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적대감은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처음에 슬쩍 비칠 듯 말 듯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게 언제였냐는 듯 임원들은 나에게 빠져들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안내했고 매일 밤 술에 취한 그들이 모두 숙소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혼자의 시간을 가졌다. 12시가 넘은 시각, 모두가 잠든 밤, 홀로 밖에 나와 한 개비 담배를 물고 바라보는 알래스카의 백야는 눈부신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나의 눈에 고이는 눈물은 왜일까? 밤에 어둠이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나의 마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일정은 마친 임원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고, 웬일인지 이 회장은 일정이 남았다며 미국에 남았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이, 아우! 내가 일주일 정도 시간을 비워뒀는데 나랑 함께할 수 있겠어?”     


그는 미국을 방문해 몇 군데 거래처를 돌며 시장 상황 살피는 걸 좋아했다. 물론 시장과 함께 관광도 빼놓지 않았으며 그건 그가 한해도 빼놓지 않는 일이었다. 이참에 그 일정을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 또한 어차피 시장 파악에 나서야 한다. 특히 그와 일주일을 더 함께할 수 있다는 건 그동안 우리의 모든 오해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나는 그가 준 거래처를 중심으로 모든 계획을 새로 세웠다.      


차를 운전해 오리건주에서 아이다호 그리고 워싱턴주를 일주하는 여정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며칠을 운전해도 거기가 거기인 듯한 끝없는 고산 사막지대(High Desert)를 거치고,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온천을 거쳐 아이다호를 방문한 우리는 강행군으로 일관했다. 미국 면허가 없는 그를 위해 운전은 내가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공식일정을 마친 우리는 북미에서는 가장 깊은 계곡으로 알려진 지옥의 계곡(Hells Canyon)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수려한 풍경과 살인적인 물살에 압도당했다. 그는 연신 감탄사를 내질렀으며 함께하는 내내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강행군에 지친 나는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내 삶에서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처절히 살아본 적이 있었을까?’ 그 순간 매일 피로에 견디지 못한 나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코피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날 밤, 나는 나의 진심을 담은 시 한 편을 그를 위해 써 바쳤다. “이순신 장군의 자랑스러운 후예이신 형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한 나의 장편 서사시는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卽生 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를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우, 고맙네! 내 이 시를 평생토록 간직하겠네, 그동안 내가 오해했어. 고마우이, 아우!"     


그렇게 우리의 밤은 감동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코피를 흘렸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는 날, 일정이 있었던 나는 진화식을 시켜 이 회장을 공항까지 배웅하게 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날, 한국으로 돌아간 이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왠지 그의 목소리는 잔뜩 성이나 있었다.     


"아니 법인장님, 당신 원래 이런 사람이야? 원래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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