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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28. 2024

3-5. 의문의 화재, 불타버린 공장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이철진은 사업 확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거래처를 만나는 일이나, 원료구매에서부터 수출까지 사업이 이루어지는 경로를 살피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이미 자기가 원하는 보고서를 써 왔고 그걸 확인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나 이외의 직원들을 차례로 불러 면담을 했고 자신이 쓴 보고서를 확정 짓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보고서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보고서를 위한 짧은 시간을 마무리하고 그가 일주일 내내 한 짓이라곤 직원들을 차례로 불러 미국에서의 생활상과 교육여건 그리고 주재원으로서의 혜택에 대해 탐문하는 게 전부였다. 그가 불러서 다녀온 정해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에게 와서 말했다.     


“법인장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저랑 면담하는 두 시간 동안 사업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 안 물어봤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물어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법인장으로 오고 싶어 하는 거 같습니다. 법인장님 자녀들 학교 어떻게 다니는지 출퇴근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엄청 자세하게 물어봤습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요,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그렇게 이철진은 오만 밉상을 미국 땅에 뿌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법인장님이죠? 여기는 그룹 감사실입니다. 다음 주 일주일간 감사가 잡혔습니다. 감사실시 명령서는 별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특별히 자회사가 아닌 그룹에서 감사가 나가는 만큼 감사 준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까지 들었던 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 청와대라도 뛰어들어 이 부당함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신제품 생산에 관한 결정은 내가 내렸다. 그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 만천하에 알릴 기회로 삼고 싶었다. 나만의 자의적 결정이 아닌 다수의 여론에 판단을 맡겨보고 싶었다. 나아가 정부와 청와대가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한국인이 한국의 기업과 한국의 소비자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 된다면 나는 이런 회사, 이런 사회, 이런 나라에 더는 미련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감사는 시작되었고 나는 관련된 모든 서류를 가감 없이 공개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지적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서류를 검토하던 감사팀은 나의 결정에 그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며 의견을 모았다. 결국 그들은 감사 기간 내에 그 어떤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미국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철진의 보고서에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 더더욱 알 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놈이 하는 짓으로 보아 이대로 물러설 놈이 아닌 건 확실하다. 그는 꽃놀이 패를 쥐고 나를 공격할 것이다. 반대로 나는 이겨야 본전인 게임에 접어들었다. ‘간첩 이철진’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놈을 죽이고 싶다는 분노로 타올랐다. 






“아들아 피해라. 얼른 피해! 그러다 큰일 나겠다. 그러다 다 죽어. 다 타 죽는다고!”      


악몽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큰 화마에 휩싸인 우리 가족을 보며 절규하셨다. 어머니가 계신 방을 향해 화마를 피해 도망치려고 아무리 문을 열어도 철벽 같은 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한참 동안 정신을 차렸음에도 화마 속에서의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마치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최근 들어 어머니가 계속 꿈에 나타나시는 게 아닌가. 얼마 전 어머니의 3주년 기일이 지나면서 나는 왠지 모를 기분에 이제 어머니를 놓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갔다. 혼자만의 간단한 의식을 치른 후 불을 피워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모두 태운 뒤 남은 재를 땅에 고이 묻었다.      


어머니는 늘 살아생전 불편하셨던 모습 그대로 내 꿈에 나타나셨다. 나는 그런 꿈을 꿀 때마다 아직도 어머니가 구천을 떠돌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의식을 치렀건만, 어머니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신 거다. 참 묘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0월의 오리건은 본격적인 우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날도 비가 내렸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직원들과 근처 식당에 가서 한참 밥을 먹고 있을 때 사무실에 남아 있던 정해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큰일 났습니다공장에 불이 났습니다빨리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불이 났다고? 911에 신고는 했어? 신고 안 했으면 빨리 신고부터 해. 지금 바로 들어갈게. 침착하게 대응해 알았어?”     


급하게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인근 소방서에서 긴 사다리를 장착한 예닐곱 대의 대형 소방차가 도착해 있었다. 몇몇 소방대원들은 이미 공장의 지붕 위로 올라가 화재를 살피고 있었다. 직원들의 통행을 전면 차단한 소방대원들은 갑자기 공장 지붕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육안으로는 불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그들의 과잉행동이 걱정됐다. 공장에는 고가의 장비가 즐비한 데다, 비가 오는 날 지붕을 뜯으면 고가의 장비와 전기시설이 망가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미국인들의 안전에 대한 과잉 대응을 탓하며 쓸데없는 피해를 걱정하기도 잠시, 공장 기계실 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붕 위에 올라간 대원들에게 소방호스가 전달되자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물을 공장 안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물을 쏘자 화마는 더 성난 듯 치솟아 올랐고 그럴수록 대원들의 동작은 민첩해졌다. 긴박한 순간이 계속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기계실에서 피어오르던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방관들은 쉬지 않고 물을 쏘았고 공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붕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고가의 장비가 가득한 공장 기계실과 기계는 온통 물에 젖었다. 전기시설도 모두 물에 젖어 모든 전기가 차단됐고 공장에는 유독성 연기만 자욱했다.     


화재가 모두 진압된 뒤에도 소방관들은 현장에 남아 통행을 제한하면서 혹시 모를 남은 불씨를 관찰했고, 꼬박 24시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화재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간밤 꿈에 나타나 절규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나에게 닥칠 이 가혹한 화마를 미리 알고 계셨던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불꽃도 보이지 않던 화재를 누군가 조기에 감지했다는 거다. 모두가 쉬는 점심시간이었던 데다 불꽃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화재를 감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냄새를 의심했던 현장 직원 한 명에 의해 불씨가 발견됐고 보고를 받은 생산 반장이 급하게 911에 신고하면서 화재는 기적처럼 진압되었다. 만약 10분만 늦었더라면, 아니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그 누구도 화재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공장뿐만 아니라 사무동까지 불바다가 됐을 건 그야말로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밀려드는 걱정에 차마 눈을 감아버렸다. 이 정도 화재라면 자회사뿐만 아니라 그룹 본사에까지 사고 보고를 해야 한다. 사고 보고는 말 그대로 사고다. 사고는 그 피해에 따라 반드시 누군가의 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 나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늘에 대고 물었다. 나의 어머니에게도 물었다. 보고도 문제지만 사고를 수습하는 일도, 멈춰버린 기계를 가지고 주문된 제품을 생산하는 일도 나에겐 마치 간밤 꿈에 꿈적도 하지 않던 ‘은산철벽銀山鐵壁’의 문으로만 느껴졌다.     


그해는 가을이 지나 연말이 다가오면서 유독 불길한 생각이 심해졌다. 그런 불길함을 달래기 위해 집어든 책은 다름 아닌 법화경(묘법연화경)이었다. 그리고 그 책의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불타는 집의 비유”이다. 자기들이 사는 집이 불길에 휩싸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그 위험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그 아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구원해 줄 아버지가 있었지만 나는 누구의 구원을 받을지 알 수 없다는 거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이 바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타는 집이구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가? 그 어떤 부귀영화도 명예도 그리고 지금 이 자리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타는 집이나 다름없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집착하는가? 도대체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나는 완전히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간략한 사고 경위를 상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더 정밀한 피해 상황과 복구 계획 파악을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소방서에도 몇 명의 직원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나에게 던진 한마디에 나는 묵직한 무언가에 세차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어제 화재 현장을 살펴본 결과 혹시 모를 방화의 가능성이 있어 추가 조사를 위해 나왔습니다.”     


‘방화? 누군가 고의로? 만약 화재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간단 말인가? 나는 절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없다. 아니, 혹시 모를 유일한 한 사람, 설마 진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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