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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31. 2024

3-6. 라스베이거스로 떠난 이별 여행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혹시 방화 가능성은 없나요?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합니다.”     


약식으로 보고된 화재 보고를 전달받은 자회사 인사부장의 상기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올해 연초에 새롭게 인사부를 맡은 부장은 그룹 본사에 근무하면서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그리고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면서 나에 대한 신뢰가 상당했다.     


“지금 소방서에서 전문가들이 나와 감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CCTV도 없고, 그것도 출입이 통제된 기계실에서 처음 발화된 거라 증거자료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자회사의 인사부장은 대놓고 진화식을 의심했다. 그가 진화식을 의심하는 이유는 최근 들어 진화식의 한국 복귀가 결정되었고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진행되고 있다는 거였다. 출처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진화식이 알았을 가능성이 큰 데다가 만약 알았다면 진화식이 한국 복귀를 늦추거나 무마하기 위해 혹시 방화를 저질렀을 수도 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화재로 인한 피해가 훨씬 컸더라면 그 수습과 복구를 위해 그 누구보다 현장 경험이 많은 진화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추측만으로 그를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은 조사 결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전화를 끊기 전에 인사부장이 나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아무튼 화재가 그만하기 ‘천만다행 千萬多幸’입니다. 일단은 화재 수습이 빨리 진행되는 게 중요합니다. 자칫 변수가 생길 수도 있어요. 진화식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나 우리 인사라인에 심심치 않게 전화가 옵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죠? 그놈은 웃으면서 등에 칼 꽃을 놈이라고. 제가 데리고 있어 봐서 잘 압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에요. 아무튼 올해는 무조건 복귀시키는 걸로 결론 내렸으니까 법인장님이 마무리만 잘해주세요. 그럼 이만 끊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In the midst of every crisis, lies great opportunity. 모든 위기의 한가운데에는 큰 기회가 숨어 있다.”

   

본격적인 화재 복구가 시작되면서 나는 그 안에 엄청난 기회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동안 경영 개선을 통해 오랜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 흑자로 돌아서긴 했지만, 그동안 누적된 거액의 자본 잠식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보험금을 타낼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위기는 한 번에 기회로 뒤집힐 수 있었다.      


공장 내부에는 두 대의 기계가 있었다. 다행히 불타지 않은 한 대를 활용해 최대한 생산을 해내면서 주문을 도저히 맞추지 못할 물량은 주변 공장을 수소문해 주문 생산을 의뢰했다. 결과적으로 이미 주문된 제품은 모두 생산해 한국 거래처에 차질 없이 공급했다. 하지만 자체 공장의 생산은 반으로 줄어들었고 그로 인한 장부상 수익성 악화는 어마어마하게 책정되었다. 처음엔 터무니없이 낮은 금액의 보상액을 부르던 보험 에이전트를 상태로 본격적인 로비를 시작하는 한편, 수학적으로 책정할 수 있는 모든 손실을 집계해 보험사에 어필했다. 숫자로 집계되는 피해액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처음 보험사에서 제안한 금액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산정된 금액으로 나는 보험사와 최종 조율에 들어갔다.     


“우리 회사는 한국의 대기업이다. 만약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막강한 변호사를 동원할 거다.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다. 결국 시간을 끌수록 당신들에게 불리한 싸움이 될 거다. 나는 초과 수익을 원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보상을 원한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미국에서 MBA 학위를 받은 정해진의 인맥을 동원해 보상 담당 에이전트에게 로비했던 것도 유효했다. 미국은 합법적으로 로비가 인정되는 나라 아닌가. 처음엔 정해진도 너무 무리라고 했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보상액으로 돌려받았다. 실지로 입은 손실을 커버하고도 한참 남는 금액이었다. 협상하는 동안 훼손됐던 공장의 모든 시설은 전면 새 걸로 교체됐다. 그야말로 화재로 인해 우리는 ‘일거양득 一擧兩得’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그렇게 화재는 시설의 개선과 자본 잠식의 완전 해소라는 쾌거를 불러왔다.  

 

이제 다시 모든 상황은 나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소문은 자회사를 거쳐 그룹 본사에까지 전해졌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나에게 늘 우호적이었던 인사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인장님, 인사부장입니다. 올해 연말 그룹 내 최우수 직원으로 법인장님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경영 실적도 뛰어난 데다가, 이번 화재에 성공적으로 잘 대처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필요 서류 잘 꾸며서 본사로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D사 이 회장, 간첩 이철진 그리고 진화식이 나에게 준 스트레스가 한 방에 모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던가? 표창 대상자로 추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사에서 표창이 확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인사부장에게서 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법인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금년 승진 인사에 여러 가지로 장애물이 자꾸 나타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표창으로 아주 쐐기를 박은 듯합니다. 어차피 자회사에서 올리는 인사 내신은 1순위가 확실합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그룹 최종 심사에서 문제 삼을까 봐 찝찝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걸로 그 모든 게 해소된 듯합니다. 조만간 전무님께서 이번 화재 건 격려 차원에서 미국을 들어가시겠답니다. 전무님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나온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런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참 많은 사람이 오고 갔으며 위기도 많았다. 결국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치 그동안 고생을 한순간에 보상받는 듯했다. 한 가지 석연치 않은 건 고의적 방화 가능성에 관한 진실을 밝히지 못한 거였지만 이제 그 또한 의미가 없었다. 이제 모든 게 새롭게 정리된 채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 되는 거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리는 오리건의 겨울은 이제 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자회사에서 전무가 회사를 방문했다. 전무도 인사의 아주 실질적인 축이라는 점에서 나에겐 매우 중요한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련의 모든 배려는 자회사 김주환 사장의 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서의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난 전무는 함께할 나머지 여행 일정을 앞두고 나에게 말했다.

    

“현 법인장, 3년 동안 참 고생 많았어. 그리고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진화식이 저렇게 사람 된 거 보니까 그동안 법인장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 봐도 알겠다. 사장님이나 인사라인에서 늘 걱정이 많았거든. 아무튼 이제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다.”     


공식 일정이 마무리되자 나는 전무와 함께 라스베이거스 일정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겨울이 될 진화식, 그를 바라보자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도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더운 여름엔 비지땀을 흘리며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겨울엔 언 손을 호호 불며 눈 내린 공장을 쓸었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도 마다하지 않았고 때로는 손님들 앞에서 개처럼 굽신거렸다.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 했던가? 나는 그를 라스베이거스 여행에 합류시켰다. 마치 그와의 이별 여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세월이라는 건 참 묘한 치료제다. 그토록 미웠던 사람도,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도 결국은 용서하게 되고 또 잊히게 되니 말이다.

     

전무와 나 그리고 진화식은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식사와 함께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카지노에 마련된 바에 들러 2차를 즐기고 있을 즈음 한국에서 문서가 첨부된 문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미국 법인 주재원 사내 공모실시>    


내가 진화식과 함께한 미국에서의 3년, 그리고 진화식의 8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마시던 맥주를 비우고 독한 데낄라를 주문해 진화식에게 건넸다. 그리고 진화식에게 문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진 차장, 야 진화식, 그동안 수고했어!”     


진화식은 그 독한 데낄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술에 취한 듯 벌겋게 충혈되어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뭐지? 이 섬뜩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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