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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04. 2024

3-7. 폭풍전야, 잔잔함은 두려움으로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카지노에서는 기계음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 ‘탐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질문 하나가 따라왔다. ‘지구상에서 라스베이거스만큼 탐욕스러운 공간이 또 있을까?’ 나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단 1초도 지나지 않아 혼자 답하고 있었다.     


‘당연히 있지. 가장 탐욕스러운 공간, 거긴 여기처럼 보이지도 않고 요란한 기계음이 들리지도 않는 곳이야. 바로 인간의 마음속, 거긴 소리도 형체도 없어. 아무리 구려도 냄새가 안 나!’     


진화식의 섬뜩한 눈빛과 카지노가 주는 탐욕의 이미지가 서로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술잔을 들었을 때 어느새 눈치챘는지 진화식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공모 문서 뜰 거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 위로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법인장님도 이미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나는 속으로 뜨끔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뜨끔함은 내가 문서가 뜰 걸 미리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너무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진화식의 태도 때문이었다. 평소 그의 성정으로 본다면 어떻게든 무슨 방도를 찾기 위해 고개를 굽신거려야 맞다. 나의 위로가 무색하리만치 그는 냉정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스쳐 갔지만 나는 애써 술기운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다.     


전무가 떠나고 진화식과 함께 회사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변함없이 나를 믿어 주고 언제나 든든한 힘이 돼 주었던 김주환 사장이 그룹 대표이사가 될 거라는 소문이었다. 지금의 대표이사와 나는 인연이 맞지 않아도 너무나 맞지 않았다. 그룹 본사에서 같이 근무한 그 오랜 시간 동안 밥 한 끼 먹지 않은 인연도 참 드물다. 더욱이 지난해 10주년 행사에는 미국에서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도 결국 틀어지지 않았는가. 그에 반해 김주환 사장은 10년 가까이 나와 한솥밥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그런 그가 회사 내 사실상 모든 인사권을 쥔 대표이사가 된다면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실현 가능성이 상당히 큰 것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연말과 함께 인사철이 다가오면서 모든 상황이 나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화재 복구의 성공적인 마무리와 함께 승진에 쐐기를 박았다고 할 수 있는 표창, 그리고 진화식의 복귀가 확정된 문서에 나의 확실한 지원자인 김주환 사장의 대표이사 설까지, 게다가 늘 나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간첩 이철진의 음모는 설득력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이철진의 교활한 음모를 눈치챈 일부 직원들 사이에는 그를 대놓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지난해 승진이 약간의 무리수를 두어야 가능했던 거라면 올해는 그야말로 제대 말년의 병장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듯 조용히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마음에 그 어떤 의심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폭풍전야 暴風前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인간의 마음은 참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왜 인간은 고요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 세상의 일이라는 게 사실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더 쉽다. 술을 마시는 것보다 그냥 쉬는 게 더 쉽고 담배를 피우는 수고로움보다 피우지 않는 편이 훨씬 쉽다. 하지만 인간은 그 쉬운 걸 견디지 못한다. 아무 일이 없을 때 오히려 인간은 더 괴로워한다. 그리고 애써 무언가를 하면서 또 아무 일이 없는 상태를 간절히 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이런 인간의 간사함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의 반복을 일컫는 것이리라. 그런 사람의 마음을 잘 알기라도 하듯 한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올여름 이철진의 음모를 미리 나에게 귀띔해 주었던 그룹 기획실의 남 팀장이었다.     


잘 지내지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 둘 중 어떤 거 먼저 들을래?”     


인사철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걸려온 남 팀장의 전화에 나는 귀가 쫑긋 섰다.      


“무슨 말이야? 내가 들어야 할 나쁜 소식이 아직 남았어? 아무튼 좋아 난 일단 좋은 소식부터 들을게, 그리고 나쁜 소식은 들어도 못 들은 걸로 할 거야. 무슨 소식인데?”     


좋아 그럼 좋은 소식 먼저 말할게아니다그냥 한꺼번에 말해줄게일단 좋은 소식은 승진이 안정권이라는 거고 나쁜 소식은 승진과 동시에 한국 복귀 인사가 있을 거라는 거야알잖아우리 회사는 승진하면 이동이 원칙이라는 거.”     


“엥? 갑자기 무슨 ‘한국 복귀’? 지금 진화식을 대신할 주재원을 공모하고 있어. 이미 공문이 나갔고 직원들 신청도 마감됐다고 했는데. 복귀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어디서 나온 말이야?”     


나도 자세한 출처는 몰라아무튼 그런 이야기가 있으니까 잘 알아봐그럼 난 바빠서 이만 끊을게.”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화식이 보여준 냉정한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진화식이 그토록 당당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만약 남 팀장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사람은 진화식이 아니라 나라는 거잖아? 그럼 설마 진화식이 법인장이 되고 새로 오는 직원이 주재원이 된다는 말인가? 이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진화식에게 법인을 맡긴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나 다름없어. 그리고 진화식이 법인장이 된다면 정해진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나는 머릿속이 하얘짐을 느꼈다. 망설일 틈도 없이 김주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김주환 사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차례로 전무, 인사부장, 인사 차장과 통화했지만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는 것 아닌가. 자회사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소문이 그룹 본사의 남 팀장을 통해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 정보의 출처는 대표이사 직속 라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대표이사 직속 라인의 의사결정이라면 나로서는 불가항력이라는 의미다.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거의 다 된 승진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모든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 어떤 인사보다 앞서서 단행되는 대표이사 인사에 김주환 사장의 이름이 확정되어 꽂히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남 팀장의 전화를 받고 며칠이 지나자 자회사에서 문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미국 법인 주재원 공모 결과 발표     


드디어 공모 절차가 모두 끝나고 주재원이 선발되었다는 문서였다. 선발된 주재원은 그룹 본사에서 인사를 담당하던 직원으로 국내 최고 학부를 나온 인재였다. 더욱이 현재 대표이사를 최근접 거리에서 모시던 수행비서 출신이다. 현 대표이사의 최측근이자 그룹 내 인사를 담당하던 그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진화식을 법인장으로 모실 일은 만무하다. 그룹 본사에 근무하면서 친분이 있었던 그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라면 이 모든 내막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재원 선발된 거 축하해요. 손민수 차장님!”     


아 네법인장님제가 먼저 전화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제가 영어 실력도 부족하고 현장 경험이 없어서 법인장님께 누가 될까 봐 걱정입니다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해 맑은 목소리와 통화 내용 어디에도 남 팀장이 말하던 내막은 묻어나지 않았다. 이제 곧 인사가 닥쳐오고 있었지만, 나의 한국 복귀를 예고하는 그 어떤 낌새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 팀장이 말한 그 소문은 무엇이란 말인가? 남 팀장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그는 무슨 연유에선지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단어일까? 나는 속으로 ‘이럴 때 김주환 사장이 대표이사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시작된 그해의 첫 인사발령, 대표이사가 되리라 믿었던 김주환 사장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대했던 김주환 사장의 이름 대신 현 대표의 ‘유임’이라는 선명한 단어가 찍혀있었다. 실망이 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혹시 대표이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1년을 더 사장으로 있을 거라던 김주환 사장이 직위에서 해제되었다는 거다. 이는 대표이사 자리를 넘봤던 것에 대한 현 대표의 응징이라는 말이 돌았다. 나에게는 늘 하늘에 떠서 나를 이끌어주던 북극성이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별안간 돛도 없이 망망대해를 홀로 떠도는 배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연이어 날아든 승진 인사 문서를 열어보는 순간,      


“허걱!!”                              






이것으로,      


3장. 음모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를 마치고,      

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과분한 사랑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보성 글이 아님에도 작품 전체 조회수가 8만 회를 넘어섰습니다.     

정말 멋모르고 시작한 연재였고, 또 주 2회 연재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저는 지금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미국 현지에 나와서 이 글을 씁니다.

여러 가지 산재한 일을 처리하면서 주 2회 글을 올리는 게 더러는 버거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 6. 4. 천상작가 해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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