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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07. 2024

4-1. 배신감, 카톡에서 '1'이 사라졌을 때

제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승진자 명단이 담긴 문서를 아무리 찾아봐도 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엑셀로 작성된 문서에 찾기 버튼을 눌러 이름 석 자를 넣어 본다. 떨리는 손으로 엔터 키를 짓누르듯 쳐 보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문서를 뒤져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어디서 온 말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마치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허허, 이 새끼들 봐라. 지금 나랑 장난하나? 개 XX들, 자유당 시절 같으면 반주먹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모여 앉아서 이따위 작당을 벌인다고? 허허 참.”     


분노가 극에 달하자 경험해 보지도 못한 자유당 시절을 운운하며 미친 사람 마냥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의 저 밑바닥에서는 알 수 없는 살기가 불기둥처럼 솟구쳤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김주환 사장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현해원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승진에 문제없을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며칠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못 봤어. 자회사 사장인 내가 1순위로 올린 사람을 승진에서 제외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무슨 심각한 사고나 징계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현 법인장, 아무튼 정말 미안하다. 내가 끝까지 챙겨주지 못해서.”     


김주환 사장, 그에게는 죄가 없다. 설령 죄가 있다면 그룹 대표이사 자리를 끝까지 쟁취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 그렇다면 결과가 이렇게 된 이유는 분명 그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룹의 최종 인사권자는 대표이사 아닌가? 그가 도대체 왜 나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하지도 않은 대표이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인사에 관해 미리 나에게 귀띔해 줬던 남 팀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대답에 나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9월에 이철진이 미국 다녀갔잖아? 그때 작성한 보고서가 문제였던 거 같아. 인사 막판에 대표이사가 그 보고서를 살펴보라고 지시했다는 거야. 그리고 하루 이틀 사이에 모든 상황이 뒤집힌 거지. 근데 그 내용이 뭔지는 아무도 몰라. 인사라인에서만 아는 거지. 이철진이 아직도 미국 법인장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거 같아. 알다시피 대표이사랑 이철진은 동향 사람이고 말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 이가 부드득 갈렸다. 하지만 남 팀장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말이야, 막판에 검증되지도 않은 보고서로 인사를 틀었다는 건 대표이사도 너를 승진에서 제외하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봐야 해. 실지로 이철진이 다녀간 뒤 그룹에서 감사를 나갔잖아. 감사 의견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게다가 그룹 내 우수직원으로 표창까지 받은 사람을 승진에서 제외했다는 건 말이 안 돼. 너 혹시 대표이사랑 무슨 ‘철천지원수 徹天之怨讐’ 진 일 있냐?”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대표이사랑 밥 한 끼 따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철천지원수’라니? 누군가 말한 대로 오히려 ‘밥 한 끼 먹지 않은 것’ 그게 원수질 일이라면 원수질 일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밥뿐만 아니라 밥보다 더한 것을 갖다 바칠 때 나는 밥 한 끼조차 바친 적이 없으니 말이다.      


대표이사는 평소 '철두철미 徹頭徹尾'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대표이사가 되기 전 간부가 될 때도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그룹 내 간부 후보 중 가장 강력한 그의 경쟁자가 익명의 투서로 인해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손쉽게 간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간부가 된 후에는 모시던 대표이사 역시 비리에 연루되어 스스로 물러났고, 그사이 그는 ‘어부지리 漁父之利’ 격으로 대표이사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리 4년을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강력한 차기 대표이사 후보였던 김주환 사장을 물리치고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잘라냈다. 만약 나에게 또 한 가지 원수질 일을 찾으라면 김주환 사장과 내가 아주 막역했던 사이라는 거다.      


처음 인사문서를 받았을 때 나는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안도감도 없지 않았다. 승진이 미뤄진 대신 미국에서의 1년은 보장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시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남 팀장의 말, “승진과 함께 한국 복귀”라는 말이 자꾸만 다르게 바뀌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승진도 안 시키고 한국 복귀?’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 준 철두철미하고 악랄한 모습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대로 복귀 명령이 난다면 나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게 뻔하다. 그렇다면 이 난관을 헤치고 나갈 방법은 무얼까?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그들의 힘에 나도 힘으로 부딪쳐 보자는 거였다. 힘으로 치자면 그들은 철저히 무장된 골리앗이었고 나는 다윗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돌팔매는 있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돌팔매라도 던져 보자!’     






돌팔매를 던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는 진심을 담은 편지를 대표이사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장문의 편지를 썼다가 지우고 또다시 쓰면서 수백 번을 고치며 최대한의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발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몇 시간을 망설이며 되뇌고 또 되뇌었다.     


‘진심은 반드시 통할 거다. 그도 처자식을 가진 사람인데 설마 온 가족이 미국에 나와 있는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할 수는 없는 거지. 그 짧은 야구 경기에서도 선발투수가 실점으로 난조를 보이면 감독이 올라와 컨디션을 물어주는 게 선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하지만 나는 실점이 아니라 엄청난 방어율로 팀의 승리를 견인하고 있지 않은가? 국내에서의 이동이라면 몰라도 온 가족의 미래와 아이들의 학업 그리고 직장에서의 나의 명운이 달린 중차대한 일을 특별한 이유 없이, 그것도 한 마디 의견도 묻지 않고 결정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결국 용기를 내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때로는 충언이 더 큰 화로 돌아올 수도 있음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전송 버튼을 누른 후에도 이게 잘하는 일인지 계속 의문이 들어 삭제 버튼을 향해 손가락이 계속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 사이 카톡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로 ‘1’이라는 숫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자 이제 답장에 대한 걱정이 나의 심장을 콩닥거리게 했다. 시간은 마치 영원인 것처럼 멈춰 섰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이 지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시로 휴대전화를 열어봐도 카톡 창에는 점하나 찍히지 않았다. 아무리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봐도 편지에 답이 없다는 건 좋은 징조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기본적인 안부는 묻는 게 예의 아닌가? 게다가 나는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미국 대표 사무소의 법인장이다. 배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루 이틀 사이 인사발령이 공표되면 그걸로 나는 끝이다. 비장한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염치 불고하고 전화드렸습니다. 미국 법인에 근무하는 현해원입니다. 진작 전화드렸어야 했는데 조금 늦은 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장님께 전화드리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면서부터 나는 우리 그룹의 일인자에 대해 떠올렸다. 대표이사가 실질적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지만 대표이사 위에 진정한 일인자는 회장이다. 사실 그룹 내에서 나 하나 정도의 인사라면 회장의 재량으로 못할 게 없다. 그리고 나는 지난해 여름 세계포럼 참석을 위해 회장이 미국에 왔을 때 그와 나 사이에 엄청난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게 됐다. 정계 진출이 꿈이었던 회장의 아주 가까운 동지 한 명이 나에게는 가족보다 더 친한 사람이었다는 걸 만찬장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회장은 비서진을 모두 물린 후 잠깐의 독대에서 개인용 전화번호를 나에게 주며 말했다.     


“자네, 정말 반갑네. 그래 이 먼 곳까지 와서 고생이 많지? 내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직통으로 전화해.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닐세. 그리고 미국 법인 실적이 많이 개선됐다고 들었어. 자네가 부임한 이후로 많은 부분이 좋아졌다고? 나도 회장 맡기 전 자네가 있는 사무실에 몇 번 갔었어. 아무튼 꼭 전화해, 그리고 한국 들어오거든 연락하고.”     


어찌 보면 나는 아주 쉽게 나에게 유리하게 인사를 해결할 기회가 있었다. 회장과의 친분을 활용했다면 지난해에 이미 승진했을 것이고 ‘간첩 이철진’에게 수모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강제된 힘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리하게 앞서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당해야 한다. 그리고 인사권을 가진 김주환 사장과 대표이사를 거슬러 무리하게 인사를 움직이는 일은 배신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지난해는 지나갔고 올해는 너무나 당연할 거라 믿은 나의 어리석음으로 또 기회를 잃었다.     


사후 약방문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처방이라도 받아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로부터 ‘자초지종 自初至終’을 들은 회장은 일의 모든 전모를 알아보겠노라며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급한 목소리로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니, 자네 왜 이렇게 바보 같아? 진작에 전화했었어야지. 자네, 내가 정계에 뜻이 있어 얼마 전 회장직 사퇴한 거 몰라? 올해 인사까지는 내가 다 마무리하고 나왔단 말이야. 그런데 이제야 전화하다니 참, 자네도 딱하네. 아무튼 지금부터라도 내 말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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